‘인간은 왜 여행을 할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많은 답변이 나올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질문이‘무의미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왜냐하면 우리인생 자체가 여행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으면 세상을 떠났다 또는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여행을 할 때도 여행을 떠난다고 하며 돌아갔다는 것은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듯이 목적지가 있는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살아가는 모든 것이 여행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큰 여행에서 일탈하여 또 다른 세계와 문화를 체험해보고자 하는 것이 작은 여행이 아닌가 한다.

이번 겨울방학에도 작은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서 다낭으로 향했다. 다낭(Danang)은  베트남 중남부에 위치하며 남중국해에 면한 주요항구 도시로 오래전부터 동서무역의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하였고, 베트남 중부지역의 최대 상업도시이다.
다낭의 도심을 흐르는 한강(Song Han)을 사이에 두고 동부 남중국해에 면한 선짜반도와 시가지로 구분된다.

역사적으로는 참파왕국의 중요한 거점지역이었고 1858년 프랑스에 점령당한 시대에는 안남 왕국 내의 프랑스 직할 식민구역으로 투란(Tourane)이라고 하였다.
1965년 3월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 파견군이 이 항구를 상륙지점으로 하였고, 또 한국의 청룡부대가 주둔하였다.

부근에는 참파왕국의 유적인 미선유적지가 있고 다낭 시내에는 참파의 유물을 보존하는 참박물관과 함께 석조물 300여점이 남아 있다.
다낭 시내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에는 5개의 작은 산으로 이루어진 오행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대리석이 생산된다. 최근 다낭의 해안선을 구성하는 차이나비치에는 외국자본의 고급리조트가 들어서고 있으며, 관광객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요즘 한국인들에게 제일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필자는 2018년 1월 12일 부산에서 출발하는 다낭행 에어부산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보다 두 시간 느린 다낭국제공항에 새벽 2시에 도착하여 입국심사를 받고서 위탁수하물을 찾고서 공항 밖으로 나오니, 수많은 가이드들이 한국어 환영피켓을 들고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최근 성수기를 맞이하여 하루에만 4000명의 한국인들이 다낭으로 관광을 오고 있다고 하는데,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다낭시내 유명한 관광지, 식당, 쇼핑센터가 한국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한국인 가이드가 있는 곳으로 와서 관광버스에 오른 시각은 새벽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많은 나라들이 자국의 일자리 창출과 고용보장을 위해서 언제부터인가 한국관광객들을  한국인 가이드가 직접 안내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자국인 가이드를 고용하게 하는 법을 만들어  일자리를 늘려 나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 다낭에서는 현지가이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자국의 불청객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베트남에만 있는 보조운전사였다.

주 운전사는 운전에만 집중하고 보조운전사는 출입문을 열어주고 짐을 실어주고 내려주고 관광객들이 내릴 때 안전하게 내릴 수 있게 받침대를 깔아주고 도로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는 길을 묻기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특히 버스 정비를 혼자 거뜬하게 해치운다고 하니 이곳 다낭에서는 카센터가 무의미 하지 않을까?
둘째 날, 아침식사를 끝내고 여행일정을 개시했는데 처음 간곳이 마사지 업소였다.
패키지여행도 많이 해보고 했지만, 마사지로 스타트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무척 당황했지만 역시 베트남마사지는 최고가 아닌가 한다. 베트남사람들이 손재주가 많은데 마사지도 예외는 아니다.

두 번째 여행일정인 마블마운틴에 올라서 기아다이 전망대에서 다낭시내를 보고 대리석 조각 전시를 관람하였다.
이 때 비가 계속해서 내려 우비를 둘러 입고 우산을 받쳐 쓰고 간 곳은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호이안 구시가지였다.
내원교, 쩐가사당, 풍흥의 집, 광조회관을 보고서 씨클로를 타고 한 바퀴 돌았으며 유람선을 타고 투본강 투어를 하였다.
저녁을 먹고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틴퉁투어를 하였는데, 그것은 매우 색다른 체험이었다.

베트남 전통양식의 바구니 배를 타고서 물속에 잠긴 코코넛 나무사이를 노를 저어가며 즐기는 강변 유람투어였는데, 노를 젓는 분이 60대로 보이는 여자 분이었는데, 다른 배보다는 속도도 느리고 역동적인 면은 없었지만 본인이 하는 일에 베스트를 다하는 모습을 보고서 느낀 점이 많았다.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끊임없이 트로트 음악을 틀어주고 그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고 해는 져서 어둑어둑한데 비 내리는 투본강에서 주현미의‘비 내리는 영동교’를 합창하였다.
베트남은 여성들이 생업에 뛰어들고 가정을 주도하는 모계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인도차이나반도의 요충지로 끊임없는 외부세력의 침략을 받았고 남성들은 전쟁터로 나가서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돌아왔기 때문에, 여성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생업전선에 뛰어들고 가정의 주춧돌 역할을 한 전통이 내려왔기 때문에 여자들의 노동이 큰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역시 다낭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호이안 구시가지 야간 투어였다.

비는 소강상태였고 투본강을 배경으로 양옆으로 형형색색의 등이 켜지며 강물에 소원 등을 띄우는 이벤트를 하고 있으며 뒤로는 야시장이 형성되어 있고 강에는 등을 밝힌 유람선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는데, 이 광경을 보는 순간, 이걸 보러 사람들이 오는구나 하는 것을 너무나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치 18세기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총천연색의 등불과 투본강의 유유자적한 모습,   야시장의 활기찬 소리들,  여러 나라 관광객들이 여유 있게 맥주를 마시며 베트남 커피를 즐기는 모습과 이곳저곳에서 공연하는 듯한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며 이것을 보는 것으로도 이번 여행을 끝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못살고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여유가 있고 인생을 낙천적으로 서로 교류하며 시끄럽게 살고 있었다.
노인인구 보다는 젊은 세대가 많은 미래가 밝은 나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는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일본사람들을 존경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그들, 한국사람들을 좋아하지만 존경하지 않는 그들, 중국사람을 좋아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그들, 그들은 베트남인들이다.


남중국해의 베트남 어획구역으로 불법 침범한 중국어선을 두 번 경고하고 나가지 않자 함포로 박살낸 그들이 베트남사람들이다.
이런 자존심 하나는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나라를 하나로 만든 배경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국부로 모시는 호치민이 있었다.

외세를 끌어들여 그들에 의존한다면 베트남은 영원히 분단국가로 남을 수 밖 에 없다는 통찰력으로 베트남인들에게 독립 통일국가를 만들어준 호치민의 위대한 리더십!
그가 죽어서 기념관을 만들려고 했더니 전시할거라고는 모자랑 옷 몇 벌, 신발 몇 켤레밖에 없었다는 노총각 호치민: 그는 베트남 국민들과 결혼했으며 자기 자신을 조국을 위해 바치겠다고 하고서 실제로 모든 걸 헌신하였다.
이제 우리나라도 그런 지도자를 꿈꿔보자.

마지막으로‘비엣남’을‘베트남’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발음이 되지 않아서 베트남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무작정 일본사람들이 부르는 베트남이라고 하지 말고‘비엣남’이라고 불러야 한다.
‘국민학교’를 이제 초등학교라고 부르듯이 비엣남을 베트남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라고 하지 않고‘띵한민국’이라고 하면 좋겠는가?
비엣남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친일청산이 이루어질 수 있다.

김형철
김포대관광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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