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고교동창 모임이 있어 모처럼 서울에 다녀왔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용산역 지하 대형마트에 잠깐 들려 필요한 물건 몇 가지를 사가지고 나왔다. 마침 출출한 터라 마트 출구 복도에 위치한 도너츠 가판대에 다가갔더니, 한 노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도너츠를 팔긴 하지만 돈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료로 나누어주는 것은 아니고, 신용카드나 현금카드만 받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현금만 사용하는 이 노인에게 “가상화폐”가 사용되는 세상은 더욱 황당하고 불편한 세상이 될 것이다. 도대체 “가상화폐‘가 뭐야? 그게 가능해? 반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필자의 고교시절 누군가가 나에게 플라스틱 카드로 세상의 모든 물건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사기꾼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새삼 세상변화를 실감하며 친구들을 만났다. 고교 졸업 후 40년 동안 한 직장에 다니다 작년 말 정년퇴직한 친구를 축하 겸 위로하는 자리였다. 고교 시절 이후 각자 흩어져 치열하게 살며 서로 연락도 뜸했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동창친구 모임이 잦아졌다.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이제 와 보니 큰 차이없이 거의 비슷한 처지임을 새삼 실감하고, 세월의 변화를 이겨냈다는 안도감과 자부심도 함께 느끼며 서로 위로한다.

그래서 옛 친구를 만나면 자연히 새로운 것 보다는 지나간 것을 짚어보게 된다. 변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어떻게 그 변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엿보인다. 변화에 대한 적응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다 죽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엄청나게 변할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인생은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인간도 그렇고 인간이 속한 세상도 그렇게 바뀐다. 스스로가 새로운 젊은 시절엔 누구나 새로운 것을 찾는다. 미완의 인생을 채워줄 새로운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젊음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고, 오래된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

문제는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세상이 되었고, 그 변화의 주기는 더욱 짧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학 기술의 진보 덕분에 평균 수명이 늘어난 인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세상이다. 변화가 대세인 디지털 세상에서 새로운 것에 적응을 거부하거나 적응 못하는 아날로그 인간은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세대가 적응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다짐과 실천이 필요하다.

첫째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변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과거를 무시하거나 경시할 필요는 없지만, 과거를 현재의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옛날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왜 이러느냐는 식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그보다는 옛날과 지금이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 이해하고, 그것을 토대로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전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지나간 시절을 기억하고 추억하기 보다는, 앞으로 무얼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고 예측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둘째는 늘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새 것 보다는 옛 것이 더 유용하고 편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새로운 것을 배울 의지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인간이 과거에 집착하는 이유는 학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회상하고 자랑하는 것은 힘들지 않다.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고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미래지향적인 인간이 되려면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학습태도가 필요하다.

변화가 거의 없거나 더딘 시절에는 새로운 것들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굳이 새로운 것을 배울 필요도 적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만 빼놓고 모든 것이 새로운 세상이다. 그래서 40년 전 만났던 고교동창생들을 만나며 다짐했다. 지난 40년을 되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남은 40년을 위해 새로이 공부하는 인생학교의 동창생이 되기로.

장호순 
순천향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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