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煞)은 사람을 해치는 모진 기운입니다. 이항복의 장인은 권율로, 본래 문신이지만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명장이기도 합니다. 이항복이 아직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정월이 되어 장인에게 세배를 드리러 갔는데 신립((申砬) 장군이 먼저 와서 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신립은 기마전에 능했으며 여진족이 몹시 두려워하는 용감한 장수였습니다. 성품도 강직해서 위엄이 있으니 뒷골목 주먹대장인 이항복과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인물이지요. 권율은 관상을 볼 줄 알아 두 사람의 낯을 살피더니 묻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상을 보니 몇 달 전하고 판이하게 바뀌었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없겠나? ”
권율의 말에 신립이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가 혼자 사냥을 나갔는데 길을 잃고 산을 헤맸다고 합니다. 무관이라 하룻밤 정도 산속에서 지내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멀리서 불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그쪽을 향해 갔다고 합니다. 커다란 기와집이었는데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고 합니다. 등잔 불빛에 사람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여 다가가니 여자가 울고 있더라고 했습니다. 외딴 집에 혼자 사는 여인의 울음소리에 바짝 긴장해서 칼자루를 잡고 왼손으로 버럭 방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울고 있던 여자가 놀라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가 여자를 진정시키고 말을 걸어보니 여자가 말하기를 근처에 도둑이 살고 있는데 부모님과 하인을 차례로 죽이고는 오늘 밤 자신을 산채로 데려가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으음, 이야기가 재미있게 되는군. 그래서?”
권율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신립은 활을 겨누고 기다리고 있다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도둑을 모두 쏘아죽였다는 것입니다. 도둑을 모두 처치했을 때 훤히 동이 트자 집을 나서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정이 꼿꼿한 무관인 그는 뿌리치고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얼마 가다가 문득 뒤를 바라보니 집이 불에 타자 얼른 달려와 보니 이미 여자는 불에 타죽고 버렸다고 했습니다. 신립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권율이 이번에는 이항복에게 어떤 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항복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주막집 할머니가 팔을 잡아끌더란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묻자 자기 딸의 소원을 풀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말로는 자신의 딸 나이가 마흔인데 너무나 추하게 생겨 남자를 가까이하지 못했는데 이항복을 보고는 첫눈에 반해 상사병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적선하는 셈 치고 하룻밤을 지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왈패라 여자문제에서도 개방적인 항복이었지만 주막집 딸을 보니 도저히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팔과 다리가 굵어 어디가 몸인지 모르겠고 얼굴은 얽어서 보기 흉한데다 몸에서는 악취마저 풍겼다고 합니다. 그래도 할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자 눈 딱 감고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딸이 죽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례까지 치러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장인은 항복이 사위이니 못마땅할 만도 한데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역시 그런 일이 있었군. 신장군은 얼굴에 살이 없었는데 생기고 사위는 얼굴에 살이 끼었는데 없어진 이유를 알겠어. 살을 섞은 후 주막집 딸에게로 살이 옮겨가 죽어버린 거야.”
결과는 분명합니다. 내년에 일어날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에서 죽게 됩니다. 원래는 조령에서 적을 막을 계획이었는데 허공에서 ‘탄금대로 가라!’하는 소리에 기마전에 유리한 탄금대로 옮겼다 합니다. 그러나 비가 와서 땅이 질퍽해서 말이 움직이지 못해 일본 조총부대에 그대로 당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역사적 사실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지요. 그랬다가는 당장 염포교의 오랏줄에 묶여갈 것이니까요.

최영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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