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남동생, 여동생과 살고 있는 아이다. 아버지는 택배 기사로 일하시다 보니 늦은 밤이 되어야 일을 마치고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은희가 초등학교 때부터 식사 준비, 빨래와 청소 등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했다. 동생들과 아버지를 챙기느라 가끔 늦게 등교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늦게 등교한 날은 꼭 교무실에 먼저 들러 왔다는 인사를 하고 교실로 가고는 했다.
“선생님, 저 왔어요. 핸드폰도 여기 있어요.”
“응. 오늘은 동생들이 말 좀 잘 들었어?”

은희의 표정을 살핀다. 밤새 울어 얼굴이 붓거나 우울해 보이는 날이 아니면 굳이 늦은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살림을 하며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분주한 아침은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것이리라.

그러던 어느 날, 은희가 연락도 없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하루가 지나고 퇴근 때가 되어서야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연락이 늦어 죄송해요.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장례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너무 놀라 바로 전화를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프셨었어? 아니면 사고 나셨어?”
“아뇨. 병은 없으셨는데, 아침에 일어나 밥 차리고 아빠 깨우려고 방에 들어가 보니 이미 …….”
울먹울먹하며 이야기하는 은희와 통화를 마치고, 다음날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 택배를 하시던 아버지는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쳐서 주무시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날 육개장을 두고 마주앉아 은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돌아가실 때 옆에 있지 못했지만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것은 아닐 거라 그게 제일 위안이 된다고 했다. 동생들과 살 길이 막막하다는 말 대신 죽음을 맞을 당시의 아빠를 걱정하는 그 애틋한 말을 듣고 있자니 그저 이렇게 착한 은희에게 고통을 주는 세상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 등교한 은희는 작은아빠네 집에서 동생들과 함께 살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중3이 되어 복도에서나 마주치던 은희가 어느 날은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 멈춰 섰다. 어지간해서는 힘든 티를 안내는 아이였는데, 그날은 앉을 곳을 찾을 시간도 없이 복도에 서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함께 살게 된 작은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은희를 비롯한 세 아이를 돌보게 된 것이었다. 자신과 겨우 5살 차이밖에 안나는 어린 작은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은희를 꼬집고 때린다고 했다. 처음에는 작은 아빠 몰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때렸다고 했다. 그래도 동생들하고 막상 갈 곳이 없어 화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작은아빠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작은 엄마가 아이를 낳으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 졌다.

은희의 동생들에게는 말을 못되게 하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은희에게는 자주 폭력을 행사한다고 했다. 동생들이 밥을 깨끗이 먹지 않으면 설거지를 하는 은희의 등을 후려치는 일. 세탁물을 모아서 빨래하려고 세탁기를 좀 늦게 돌리면 게으르다고 꼬집는 일. 그래서 매일 세탁기를 돌리면 아기가 자는데 시끄럽게 한다. 또는 수도세를 네가 내느냐 등의 트집을 잡아 쥐어박는 일. 머리채를 잡힌 어느 날은 은희도 참다못해 작은엄마를 밀고 옥신각신 몸싸움을 했다는 등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은희는 등록금이 지원되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그렇게 4년 동안 작은엄마와의 삶을 참아냈다. 젊은 나이의 작은엄마 입장에서도 세 조카와 함께 자신의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든 상황이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어린 은희에게는 가혹한 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개월 지났을 때 쯤. 5월의 황금연휴를 앞두고 있던 날에 은희가 교무실에 찾아 왔다. 더 예뻐진 얼굴에 수줍은 미소는 여전했다.
“어머, 은희야. 잘 지냈어? 어떻게 왔어?”
“선생님 뵈려고 왔어요. 오늘 회사 쉬는 날이거든요.”
“그랬구나. 정말 보고 싶었어. 반갑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저는 시흥에 있는 의류회사에 취직했어요. 회사에 기숙사가 있거든요. 거기서 먹고 자고 잘 지내고 있어요.”
“동생들은 아직 작은아버지네 있고?”
“네. 아직 어려서 데리고 나올 수 없었어요. 제가 집을 얻을 형편도 아니고요.”
“그렇구나.”
“다행히, 작은엄마가 저만 미워하지 동생들을 때리거나 하지는 않아요. 눈치주고 구박은 좀 하지만···.”
“응. 힘들 텐데 잘 이겨내고 있네.”
“돈 좀 모으면, 동생들 데리고 나와서 같이 살려고요.”
회사 상사가 남자친구가 된 이야기와 그래서 마음으로 의지할 곳이 있어서 좋지만 결혼을 일찍 할 생각은 없다는 이야기도 했다. 회사를 다니다가 언젠가는 대학을 가고 싶다는 등 많은 이야기로 수다 꽃을 피웠다. 어른스러웠던 은희는 더 의연한 모습의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만난 지 아무 소식 없이 벌써 2년이 흘렀다. 돈을 빨리 모아 동생들과 한 가족으로 합치기 위해 기숙사에 살면서 일하는 데 전념하는 은희의 20대는 얼마나 마음이 분주할까 상상해 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길 기대하며, 언젠가 은희에게 연락이 온다면 동생들과 함께 누구의 눈치도 안보면서 오손도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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