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문화재단은 지난 6월 7일 김포시 통진읍 마송1로 83번길 50(마송근린2공원 내)에 있는 ‘토탄·농경유물전시관’에서 ‘김포도작문화 이야기’를 주제로 임효재 박사(서울대 명예교수)와 구술조사를 위한 대담을 했다. 이 자리에 임 박사와 오랜 동안 공동조사를 한 인연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이 날 필자는 이 곳 전시관에서 2백여 점의 낯익은 농경유물과 만나면서 만감이 오고 갔다. 

이 농경유물과 민속품은 2009년 6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김포문화원이 "내 고장 역사찾기 및 김포 근·현대 역사자료 조사·수집사업"의 일환으로 수집 내지 희사 받은 것들로서 향후 김포시농업박물관이 세워지면 기증자의 이름을 기록하여 전시하겠다고 약속한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 향토사연구소장으로 이 사업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이 지면을 통하여 기증자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무려 170여분의 기증자로부터 1,870여점의 소중한 유물을 수집하는 과정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재정이 열악한 문화원이 이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희망근로사업과 연계하여 지원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실행이 가능했다. 조사요원으로 30여 명이 투입됐고 지역사료위원들의 헌신적인 참여가 큰 힘이 됐다. 김포태생인 사료위원들은 손수운전을 하면서 유물소장자들을 찾아가 설득하고 희사하도록 권유했다. 당시 조사위원들이 받은 월 근로수당은 상품권(25만원)을 포함하여 70여만 원으로 차량운행 비용과 중식비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임원은 조사위원들을 ‘파렴치한’으로 매도하는 서신을 배포하여 한때 억울한 수모를 당한 적도 있으나 이를 슬기롭게 참아 넘겼다.

전국 228개 지방문화원 중 내 고장의 농경유물과 선조들의 손때가 묻은 생활민속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한 문화원은 아직까지는 김포문화원뿐이다. 이 어려운 일을 진행하는 동안 원장은 항상 작업복차림으로 손수 화물차를 운전하여 수집품의 운반을 도울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더하여 사업단장의 의욕과 지혜가 이를 뒷받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의외의 생뚱맞은 일로 집행부와 임원간의 반목과 갈등이 증폭되면서 "내 고장 역사찾기 사업"이 도마 위에 올랐고 법적인 다툼으로 까지 비화된 적이 있다. 이러한 내홍 중에도 수집사업은 정상적으로 진행됐고, 나진교 근처에 있는 창고를 임대하여 1,870여점의 유물들을 손질하여 소장하고자 분류를 마쳤다.

그 후 이 유물을 소장하고 관리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이 문제가 됐고, 마치 애물단지처럼 취급을 받게 되어 급기야는 김포시가 맡아 관리하게 됐다. 농경유물이나 생활민속품은 거의가 나무와 볏짚을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보관하지 않으면 부식하여 소실(消失)될 수 있어 소장에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김포시는 한때 이 소중한 농경유물과 박물류 들을 고촌초등학교 옛 교실에 나누어 보관한 적이 있으며  이 때 마구 쌓아 놓고 습도를 맞추지 않아 이미 원형을 상실했거나 변형된 것이 많다고 들었다. 고촌초등학교 옛 교실이 철거 된지 오래 됐는데 1,870여점의 유물이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보관·관리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문한 바에 의하면 일부는 태산패밀리파크에 치장용으로 전시된 것도 있고, 또 일부는 통진두레문화센타에 전시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김포시는 미래지향적인 대아를 위하여 거시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 고장 선조들의 역사적 숨결이 살아 있는 살림살이 박물류들은 다시는 수집이 불가능한 것들이 많다. 더욱이나 '5000년 농경문화'를 김포의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향후 농업박물관을 만들려면 더 이상 이 값진 보물들을 쓰레기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돈이 들어가는 귀찮은 물건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는 미래를 보는 철학의 빈곤이다. 지금 김포시는 인구 40만을 눈앞에 두고 있고, 김포문화재단도 만들어 잘 운영하고 있다. 이 유물의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에 예산을 아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다가올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다.

류지만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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