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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겨레를 위하여 8

돌의 겨레를 위하여 8

그렇다면 한국 강단사학자들은 암각화 연구를 왜 기피했을까? 역사적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저들은 한국 상고사를 철저하게 일제가 만들어준 식민사학의 기본 틀에 끼워놓았다. 한국의 역사 시대는 중국의 식민지 한사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중국 한자가 유입된 시기는 서기전 400년경에서 서기 1년 사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문자가 있어야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 세계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문자가 이 시기에 수입되었으니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역사는 저절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전회에서 살펴 본 남해석각 문자는 한국 강단사학계의 정설이 허구라고 소리친다. 남해석각 문자는 서기전 3000년경부터 서기전 2500년경 사이에 새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해석각 문자는 한자의 원류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경우 서기전 2500년경 이전에 이미 한자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거로써 증명된다. 강단사학계의 개뼈다구 같은 정설이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역사학계가 암각화 연구를 의도적으로 회피해왔던 것이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처음 사용한 시기는 서기전 1384년경이다. 상나라 제20대 반경이 은허로 쫓겨 온 이후다. 남해석각은 중국 최초의 갑골문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시기의 한자다. 그렇기 때문에 갑골문·금문·대전·소전으로 발전해 온 중국 한족 문자와 남해석각은 문자의 체계가 전혀 다르다. 이것은 중국 한족 문자와 한국 한자韓字의 문자 체계가 기본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엄청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한국 강단사학계는 한국 상고사의 체계를 일제 식민사학에 끼워 맞추려고 한국 청동기 문화의 편년을 서기전 1000년 이내로 한정시켰다. 즉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제아무리 빨라야 서기전 1000년경 이후에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을 합리적으로 부정하려고 설치해놓은 매우 의도적인 장치였다. 남해석각은 한국 청동기문화에 대한 강단사학계의 이러한 정설이 거짓말이라고 함성을 지른다.

 남해석각문자는 단단한 바위에 새겨진 고대 한자다. 도구가 없던 고대인들이 도대체 무엇으로 단단한 바위에 문자를 새겼을까? 대나무였을까? 동물의 뼈였을까? 아니면 돌이었을까? 대나무나 동물의 뼈로 바위에 오천년이 지나도록 선명한 문자를 새긴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된다. 저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 직접 성공해 보일 때까지 강단에서 물러나라고 하면 된다. 날카로운 돌로 문자나 그림의 형태를 바위에 남기는 것은 일단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돌로 남해석각처럼 5000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좁고 깊은 문자를 바위에 새기는 것은 역시 불가능하다.

 남해석각은 청동검이나 청동도끼로 새긴 문자다. 청동의 도구가 아니고서는 바위에 저토록 깊고 분명한 문자를 새길 수 없다. 강단사학자들은 이 사실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남해석각 문자 연구를 의도적으로 회피해왔던 것이다. 진실이 드러나면 한국 청동기문명의 상한을 서기전 3000년경으로 끌어올려야하니 회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강단사학자들은 그동안 왜 한국 상고사를 깎아내리려고 저렇게 발버둥을 쳐 왔을까? 한국 강단사학계의 이러한 태도는 순수한 학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여 진다. 한국 강단사학계에는 일본 우익과 중국 정보기관의 촉수가 깊이 침투해 있다는 의심을 지울 길이 없다. 어찌되었건 한국은 강단사학자들이 민족사를 짓밟아야 성공하는 나라다.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나라인가?

우창수
민족사바로세우기
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bwwji24@naver.com

우창수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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