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안시아

빈 유리잔이 창가에
긴 그림자를 엎지르는 동안
똑딱똑딱 적요가 잘려나가요
하늘엔 하얀 구름 두 줄기가 수직으로
비행기 꽁무니를 따라 오르는데요,
날갯짓은 없구요 기준은 수평이에요
그 하늘 아래 코스모스는 뿌리부터 타들어가구요
땅속부터 번진 불길을 온몸으로 견뎌내
가을이 깊어요 꽃잎도 허공에 딱 들어맞아요
향기도 더 이상 부풀지 않았어요
지난 해 신던 구두를 신고 걸어요
또각또각 클릭소리를 내더니 하나 둘
주소를 불러들이는 걸까요
다시 그 자리가 덧나고 있어요
삭제해야 될 주소는 당신이 아니라
기억이에요 커튼이 가리고 있는 건
창문이 아니라 창 너머이듯
내일을 살고 있는 나는
막 오늘의 구름을 지웠어요

[프로필]
안시아 : 서울, 서울산업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현대시학 등단, 시집 [수상한 꽃]

[시감상]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할 것이 남아 있다는 말과 같다. 아니면 기억해야 할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기억할, 기억해야 할, 모두 능동태를 의미한다. 네가 나를이 아닌 내가 너를 기억한다는 말의 배후엔 어쩌면 네가 나를, 이라는 염원이나 바램 등등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기억을 하는 것은 ‘나’이지만 기억의 대상은 ‘나’이외의 다른 ‘너’ 혹은 ‘당신’. 가끔 기억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하는 마술을 부린다. 오늘, 지금, 우린 무엇을 지우거나 다시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지? 구름이든, 주소든, 창 너머든, 오늘을 기억하는 내일이 되면 좋겠다. 

[글/ 시인, 문학평론가 김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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