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의 여러 포구들 2
 

서울과 가까운, 한강 끝자락의 포구들
김포 반도를 둘러싼 한강, 조강, 염하강의 세 강 가운데 가장 긴 물줄기인 한강 끝자락. 그 물길을 따라 여러 포구들이 있었다. 바다보다 더 거센 밀물이 순식간에 마포까지 치달아오르던 곳, 그 밀물에 의지해 경강을 향해 가던 배들이 마지막 숨을 고르던 곳이었으며,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었다.

1. 강이 바다를 만나 뒤집혀 흐르는 곳, 전류리포구
현재는 민간인통제구역으로 대부분 어업활동이 금지되었지만, 전류리포구는 허가받은 지역 어민들이 군의 통제 하에 현재까지도 어업활동을 하면서 한강의 유일한 포구, 마지막 포구로서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전류(顚流)'라는 지명은 물이 뒤집혀 흐른다는 뜻으로 바닷물과 강물이 하루에 두번씩 교차하며 뒤섞이는 이곳의 지형적인 특성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그 유래가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공민왕 때 민유(閔愉, ?~? 고려 말의 문신)가 학사 주사옹과 함께 신돈(辛旽, ? ~ 1371)의 난을 피해 김포 童城縣(통진)에 입향하여 정자를 짓고 서로 시와 술을 즐기며 살았다고 하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바로 '전류정(顚流亭)'이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동여도(東輿圖)>에도 통진에 전류정의 이름과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문헌기록은 최근 봉성산(奉城山) 북동쪽 전류정터로 추정되던 곳의 시굴조사 결과 고려~조선시대 건물지와 기와편 등이 출토됨에 따라 실제 이곳에 고려시대부터 정자가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이곳은 경관이 수려해 영조 때 권집경(權執經)은 그의 시에서 '전류정에서 바라보는 해질녘 한강의 물안개'를 '통진 석탄정사(石灘精舍)'의 8경 가운데 하나로 들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전류정'을 복원한다면 이 지역 이름의 유래가 된 오랜 역사를 가진 정자이자, 강과 바다가 만나는 이루는 이 지역의 독특한 생태, 부근의 이름난 경치 등을 말해주는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가 될 것이다.

한편, 『조선지지자료』(1911)에서 전류리포구는 '전류정나루'라고 표기되어 있고 '전류리주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류리 포구에서 봉성산을 돌아 맞은편 기슭에도 '봉성포(奉城浦)'라 하는 또다른 포구명과 함께 '봉성리주막'이 기록되어 있어 이 일대가 포구와 주막으로 얼마나 번성하였을지 쉽게 추측하게 한다. 봉성포는 근대기 이후 연안 퇴적과 간척 등으로 그 기능을 상실하고 전류리포구가 명맥을 이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1> 19세기 중반 <동여도>에 그려진 통진군 오른편 하단 '봉성(산)' 위로 '顚流亭(전류정)'이라 쓰여진 것이 보인다.


2. 감바위 전설이 서린 곳, 감암나루
감암나루는 고문헌 및 고지도에 매우 이른  시기부터 언급되고 있어 오래 전부터 있었던 나루였음을 알 수 있다. 확인되는 가장 빠른 기록으로는 『고려사』 조운(漕運)條에 "자석포(慈石浦) : 과거명칭은 감암포(甘岩浦)로 김포현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당시 감암포가 자석포로 불리었으며, 이전에도 감암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감암진(甘巖津) : (김포현) 북쪽으로 8리이니, 바로 고양(高陽) 임의진(任意津)의 소로(小路)이다."라고 하였다. 1919년 근대지도에도 고양 이산포(二山浦)와 뱃길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한편 포구 이름인 감암(甘岩)은 우리말로 '감바위'로 감박산 북쪽 한강섶에 있는 반석(盤石)을 말한다. 현재 감암포구는 군부대 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지만 이곳에는 강쪽으로 툭 튀어나와 배를 대기에 좋은 너른 바위가 있다. 김포군 『지명유래집』(1995)에는 이 감바위와 관련하여서 여러 이야기가 전하는데 먼저 중봉(中峯) 조헌 선생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달래며 낚시질을 하던 곳으로 이러한 연유로 '대감바위'가 '감바위'로 된 것이라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감박산이 천신제를 지내던 산으로 감바위(甘岩)에서 용왕제(龍王祭) 정도의 천신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감'은 고어 'ᄀᆞᆷ' 계(系)의 단어로 예로부터 인명, 지명에서 신(神), 왕(王)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감바위 부근은 예로부터 경관이 수려해 '구복정(龜伏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19세기초에 그려진 <광여도(廣輿圖)>에서도 확인된다.
 

<그림2> 19세기초 <광여도>에 그려진 김포군동서남북을 뒤집어 그려 위쪽이 서해이고 아래쪽이 한강이다. 하단 왼편에 '영사정'과 '薪谷(섶골)', 오른편에 '구복정'과 '甘巖(감바위)'가 보인다

3. 우(牛)시장으로 가기 위한 정박지, 섶골나루
섶골나루는 고촌읍 풍곡리에 위치한 나루로, 고지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근대지도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근대기에 형성된 나루로 보인다. '섶골'은 한자로 '신동(薪洞)'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싸움에서 왜의 전선(戰船)이 이 마을쪽 산밑 강을 지날 무렵 주민들이 장작에 불을 붙여 산 아래 강을 지나는 왜선(倭船)에 던져 불살랐다하여 장작마을이라는 뜻에서 섶골(薪洞)이라 했다고 한다. 한강제방을 막기 전에는 한강물이 이 마을까지 올라와 배를 대곤 했으므로 배대이(渡船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한편 1919년 근대지도에는 고양 신평리와 연결되어 있는 뱃길표기와 함께 석동진(石洞津)으로 기재되어 있다. 실제로 섶골나루 부근에는 어물(魚物)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얼음을 저장했던 빙고터가 전하고 있는데, '石洞'이 이 빙고와 관련된 지명이라면 석빙고가 있었어야 할 터인데 주민 전언으로는 재래식 토빙고였다고 하니 이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1919년 근대지도에 섶골나루에서 고양 신평리에 연결되는 뱃길이 표기되어 있어, 감암나루와 마찬가지로 김포와 고양을 연결해주는 나루터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섶골나루는 우시장으로 유명했던 인천 계양산 근처에서 열리는 황어장을 오가는 상인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섶골나루 부근 주민의 이야기에 따르면 황어장을 갔던 상인들이 다음날 고양장을 가기 위해 섶골나루에 하룻밤 묵는 날 밤이면 온 동네가 소 울음소리로 잠을 못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섶골나루 부근에는 새우젓독 만드는 가마가 있어서 독이 유통되기도 했던 곳이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실제로 아직도 주변 민가들 마당에서 입지름이 바닥지름보다 살짝 넓고 일자형으로 쭉뻗은 형태의 새우젓독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연재를 마치며
과거 김포는 강을 따라 내려온 이야기가 서해 밀물을 따라 밀려온 이야기와 만나는 곳,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풀어놓는 보따리들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이 쉴새없이 넘실거리고 오르내리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배가 닿는 곳, '포구'가 있었다. 포구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 물과 육지가 만나는 곳, 지역과 지역이 만나는 곳,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었다. 김포의 경제이자, 정치이며, 문화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은 더 이상 포구를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조강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잊고 있던 순간에도, 시간을 인내하며 한결같이 우리 곁을 흐르고 있던 저 강물처럼, 긴 기다림 끝에 막혔던 길이 다시 뚫리고 조강에 배를 띄울 수 있게 되는 그 날, 김포는 다시 흥청거리는 이야기들로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1)『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류산(鎭流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전류산(顚流山)이라는 표현도 함께 등장하는데, 진류산의 표기가 전류산으로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형숙
김포문화재단
문화유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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