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김포의 여러 포구들 1

지난 회의 조강포에 이어 이번 회와 다음 회에서는 2회에 걸쳐 김포의 다른 주요 포구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북녘땅과 마주한 조강의 포구들
1. 난파선들의 무덤, 강령포
먼저 강령포(康寧浦)는 조강포와 함께 오랜 시간동안 포구로서 기능하였던 역사깊은 포구로 한때는 조강포보다 더욱 번성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경인교육대학교 전종한 교수가 1911년의 지적원도와 1912년의 토지조사부를 분석한 결과 강령포의 대지(垈地) 필지 수가 조강포와 마근포의 그것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 근대기까지도 이어졌던 강령포의 위상을 짐작케한다.
특히 강령포는 개성의 가장 큰 포구이며, 관문이기도 했던 영정포를 오가는 나룻배가 정기적으로 운행되었던 곳으로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의 강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포구였다. 이러한 배경을 두고 기생 이계월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고려 말 개성으로부터 조강을 건너 강녕포로 내려와 활동하던 그녀의 명성이 서울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마포나루에서 배로 타고 강녕포로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강령포는 '이계월촌'으로 불리기 시작하여 '이계월(이기울) 보러간다'하면 곧 '강녕포를 간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고 한다.

한편, 강령포는 주변에 암석이 많아 사고가 잦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강녕포와 북쪽 유도 사이 한강 가운데에 있는 '노구여'(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로 인해 배가 자주 좌초되었고 이 때문에 뱃사람들은 강령포 앞 당산에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당제(용왕제)를 지냈다. 실제로 <매일신보>에 1917년 12월 용강리 앞바다에서 콩을 실은 곡물선이 바위 뿌리에 충돌하여 난파하였다는 기사, 1930년 8월 문산 장(場)으로부터 직물과 생선을 배에 싣고 강화도로 향하던 상인들의 배가 강령포 앞에서 좌초되어 배에 탔던 18명이 모두 희생되었다는 기사 등 고신문에서도 강령포 난파 관련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당산과 마을이 있었던 지역에는 현재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고 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2. 조강연안의 신흥강자, 마근포
마근포(麻斤浦)는 조강포 동측 하성면에 위치한 포구로 강령포, 조강포와 함께 조강의 대표적인 포구이다. 마근포는 조강 연안의 세 개 포구 가운데 가장 늦게 성장한 포구로 보인다. 『지명유래집』(김포군, 1995)에 의하면 마근포는 우리말 '막은 개'라는 뜻으로 '막은'의 음을 따서 '마근(麻近)'이라 하였다고 한다. 원래 마근포 주변마을에 물길을 따라 여러 개의 포구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금포리(金浦里), 마조포(麻造浦)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포구가 1919년 근대지도에는 금포리(金浦里), 마조리(麻造里)로 표기되고 농경지(간척지)화되어 있으며, 두 마을 사이에 신리(新里)라는 지명과 함께 '마근포'가 표기되어 있다. 이 무렵에는 금포와 마조포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마근포만이 포구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새 마을(新里)', '막은 개(麻斤浦)'라는 명칭에서도 보이듯이 마근포는 근대이행기에 연안 퇴적과 갯벌 간척으로 새롭게 생긴 마을에 등장한 신흥포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부근의 금포와 마조포가 갯골이 막혀 더 이상 포구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함에 따라 마근포가 이들을 대신하며 성장하였던 것이다.

마근포는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가거나 강건너 개풍군 임한면 정곶리(丁串里) 사이를 왕래하던 사람들로 항시 북적였을 것이다. 고령 주민들의 전언으로는 포구 마을이 있었던 마지막 기억으로는 주막이 4개 있었고 시장도 열릴 정도였다고 한다. 주로 잡히는 어종은 웅어, 새우, 까나리 등이었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에는 가마니창고, 쌀 창고 등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로 가는 배들은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아니라 수심이 깊은 곳에서 대기하였고, 식수나 물품이 필요하면 '뗏마(=작은 전마선, 노 젓는 배)'라고 하는 작은 배를 타고 포구로 오거나 했다고 한다.
 

<그림1 조강 연안의 포구들>

강화와 마주한 염하의 포구들
3. '산성나루'로 불려야 할 갑곶나루
갑곶(甲串)나루는 문수산성에 속한 나루로 지금은 허물어져 사라진 문수산성 서문(西門)인 공해루(控海樓)와 연결되던 나루였다. '갑곶(甲串)'이라는 지명은 고려 고종이 몽고군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을 때 이곳의 수심이 얕아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갑곶나루는 1872년 지방도에는 '통진갑곶(通津甲串)'으로, 1895년 지형도에는 '성내리(城內里)', 1911년 조선지지자료에는 '산성나루(山城津)', 1919년 지형도에는 '성동리(城東里)' 및 '성내리(城內里)'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반면, 김포의 갑곶나루와 대응하는 강화 쪽의 나루는 18세기~19세기 고지도에 모두 '갑곶(甲串)' 혹은 '갑곶진(甲串津)'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민 면담을 통해서도 김포의 갑곶나루가 '성동나루'로 불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의 갑곶나루에서 명칭을 '산성나루' 혹은 '성동나루'로 정정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4. 고양포에서 원우포로, 원모루나루
월곶면에 위치한 또 다른 포구인 원모루나루는 김포에서 현재까지도 어업활동이 이어지고 있는 몇 안 되는 포구 중 하나이다. 원모루(원머루)는 '언덕 원(原)'과 '높은 곳'을 의미하는 '마루(머루)'의 합성어로, '높은 언덕',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한자로 옮기면 '고양포(高陽浦)'이다. 이 마을의 진산(남산:180.2m)이 뒤에 솟아 있어 이러한 지명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1872년 지방도에는 '죽진(竹津)'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1895년 지형도와 1908년 한국수산지에는 '고양포(高陽浦)'로, 1911년 조선지지자료에는 고양포리(高陽浦里)에 속한 '원우포(遠隅浦, 원모루)'로 기록되어 있다.

1919년 근대지도에는 원우포에서 강화 불은면 고릉리로 이어지는 뱃길이 표시되어 있어 포구기능과 함께 강화로 건너는 나루의 기능을 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지도에서 원우포보다 만(灣) 안쪽으로 '고양리'라는 지명이 있고 주변이 농경지(간척지)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 확인되는데 이곳이 원래의 원모루나루 즉, '고양포' 자리로 추정된다. 즉, 연안 퇴적, 간척 등에 의하여 기존의 고양포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현재의 원모루나루 부근으로 자리를 옮기며 '원우포'라는 이름으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5. 덕포진 본진(本鎭)이 있었던 곳, 신덕포
신덕포(新德浦)는 대곶면 부래도 안쪽에 위치한 포구로 원모루와 마찬가지로 현재 군사지역 안에 위치하여 제한적으로나마 어업 활동이 지속되고 있는 곳이다. 포구가 위치한 부근은 원래 덕포진(德浦鎭) 본진(本鎭)이 위치하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옛 지명은 상신리(上新里)로 그 전에 이 지역에 있던 법정리인 신리(新里)를 상하(上下) 두 개의 里로 나누어 생긴 명칭이다. 18세기 이래 대부분의 고지도, 고문헌에 '덕포(德浦)'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비해, '신덕포(新德浦)'라는 명칭은 1696년 강화지도에 처음 보이고 이후에는 보이지 않다가 1919년 근대지도에 다시 등장한다. 1909년의 한국수산지에는 마을이름을 딴 '상신포(上新浦)'로 기재되어 있다.

<그림 염하 연안의 포구들>

 동일한 포구를 '덕포'와 '신덕포'라는 이름으로 혼용해서 부르고 있는 것인지, 서로 다른 포구를 지칭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포구 위치의 변화로 인하여 새롭게 부여한 명칭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신덕포 주변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30~40여 년 전 지금의 모습으로 간척되기 전 원래 포구의 위치도 현재 위치보다 훨씬 마을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1919년 근대지도에서도 신덕포의 만(灣) 주변이 이미 간척으로 인하여 농경지화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만 안쪽으로 '마당포(麻唐浦)'라는 지명이 있다. 경인교육대학교의 전종한 교수는 고양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을 깊숙이까지 물이 들어왔던 과거에는 마당포가 주요 포구로 이용되다가 근대기 이후 지형변화로 농촌화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灣) 입구의 '신덕포'가 그 대안포구로 성장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앞선 마근포, 그리고 원모루와 신덕포 등 여러 경우를 통해 조강 연안과 염하 연안의 포구들이 지형변화에 따라 기존의 포구들과 신흥 포구들이 세대교체를 해가며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물길을 따라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김포 곳곳에 존재했던 크고 작은 포구들은 이제는 농촌화되고 도시화되어 지명(地名)을 통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박형숙
김포문화재단
문화유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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