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김포의 옛 포구 - 조강포구

 

한강의 끝자락 임진강과 합류하여 북한 개풍군과 김포 반도 사이를 흐르는 강, 조강(祖江). 남북분단으로 더 이상 사람이 갈 수 없게 된 조강은 언제부터인가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 조강은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심장과도 같은 강이었다.

할아버지 강, 조강(祖江)
조강(祖江)은 강의 이름이다.
한강의 끝줄기, 김포를 감싸고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일정 구간의 강을 일컫는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과 같은 기록에서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지점을 조강의 시작지점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끝지점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좁은 의미에서는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 염하의 북쪽 끝지점을 조강의 종점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강화도와 황해도 사이를 흐르는 유로의 끝지점을 조강의 종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강(祖江)’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흔히 총길이 514km에 달하는 한강이 조강에 이르러 그 수명을 다했다는 뜻에서 ‘祖江=할아버지 강’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기언별집』(1658)에서는 조강의 의미를 두 강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뜻이라 하였으며, 한강, 임진강, 조강의 세 줄기가 만난다는 뜻에서 ‘삼기하(三岐河)’라고도 칭한다고 하고 있다.

'풍덕조강'과 '통진조강'
한편 조강(祖江)은 지역이름이다.
현재도 월곶면 '조강리(祖江里)'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는 '祖江'은 문헌 기록상에서 강 이름이면서 동시에 때로는 마을이름, 때로는 포구이름으로 혼용해서 쓰이고 있다.
한편 통진 조강(현 월곶면)과 마주하고 있는 강 건너 북쪽에도 조강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바로 풍덕군 임한면(현 개풍군)의 조강이다. 19세기의 지도에는 '祖江津', '祖江'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 지적원도에는 '상조강리(上祖江里)'와 '하조강리(下照江里)'로 쓰이고 있다. 특이한 점은 '祖江'과 '照江'으로 각기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다. 포구는 하조강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지형도와 지적원도의 분석 결과 통진 조강포구와 뱃길로 연결되어 대응하는 포구였으며, 통진 조강포구의 규모에 비해 풍덕 하조강리의 조강포구는 그 규모가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통진 조강포구가 강을 건너기 위한 나루의 기능과 함께 기항지로서의 조운의 기능을 겸하였던 것에 비해 풍덕 조강포구는 주로 나루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림 풍덕(豊德) 조강포구(現개풍군)와 통진(通津) 조강포구(現월곶면)

조강의 특산품 황대어(黃大漁)
『세종실록』 「지리지」(1454)의 '경기도 부평도호부 통진현' 조에는 '조강'의 특산품이 황대어(黃大漁)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맛이 유명해 중국의 왕이 사신을 보내 구해오라고도 했다고 한다.

… 조강은 현의 북쪽에 있다. 나룻배가 있다. 황대구[黃大漁]가 나는데 이 고기는 다른 곳에는 없으므로 宣德 때에 명나라 사신이 황제의 명으로 구해 갔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도 부평도호부 통진현’)

시 속에 등장하는 조강의 풍경
  한편, 한성과 가까웠던 조강은 중앙의 관료들 및 다양한 묵객들이 수시로 오가며 시나 산문을 짓기도 하던 곳이었다. 먼저 고려 말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탄핵을 받아 개경에서 계양(현재의 부평)의 수령으로 가던 길에 조강을 건너던 심정과 당시의 조강 풍경을 「조강부(祖江賦)」 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넓디넓은 강물이 / 경수처럼 흐린데
시커먼 빛 굼실굼실 / 굽어보기도 무서워라
여울져 솟구치는 모양 / 구당에다 비할쏜가
달리는 뭇 내를 모았으니 / 솥의 물이 들끓는 듯
이무기와 악어가 입을 벌리고 / 독룡이 숨어 엿보는 듯
물살을 거슬러 나아가려 하나 / 배가 가는 양 그대로 멎는구나
저녁이 아닌데 어두워지고 / 바람도 없는데 물결친다
눈 같은 물결이 쾅쾅 돌에 부딪는 모양 / 秦과 晉이 팽아에서 싸우는 듯
저 사공은 집채 같은 물결에 익숙해도 / 빙빙 도는 소용돌이를 무서워하네
…(하략)…
(「祖江賦」, 『동문선』, 제1권)

또한 고려의 시인 백원항(白元恒, 1260?-1330?)은 「조강에 이르러」라는 제목의 시에서 조강의 어느 포구를 노래하고 있다. 물때에 맞춰 배를 띄워야 했던 조강의 환경 조건과 당시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나루 풍경을 볼 수 있다.

조각배 떠나라고 늦은 조수는 재촉하는데
말을 세우고 강에 다다라 혼자 냉소하네
언덕 위의 세상일은 언제나 끝날 건가
앞사람 건너지 않았는데 뒷사람 오누나
(「行到祖江有作」, 『동문선』, 제20권)

17세기 초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지은 「조강행(祖江行)」은 해질녘 조강의 주막에 도착해서 강촌 노인의 신세 한탄을 듣는 내용이다. 노인은 조강나루가 흥성하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데, 장관을 이루었던 조강의 풍경을 통해 조강이 당시 물류와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조강은 일명 ‘삼기하’라 하니 세 강이 바다로 함께 조회하기 때문이지요
남으론 호남, 서쪽으론 낙랑(평양)으로 통하여 잇닿은 배들이 베틀이 베틀의 북과 같았고
고기 · 소금 · 과일 · 베 · 쌀이 산같이 쌓일 땐 하루에도 이천척이 오갔다오
…(중략)…
달지고 조수 불어나면 배 위에 사람들 두런거리고 봄빛은 강가 버드나무에 물씬 일렁였구요 해마다 이 항구는 번화하여 북녘 길손도 평양 자랑을 못했다오

조강물참(축일조석시)
조강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시는 이규보가 지은 ‘축일조석시(逐日潮汐詩)’로 하루 두 번, 8시간 밀물이 들고 4시간 썰물이 나는 조강 유역의 조수간만의 차이를 시로 지어 뱃사람과 지역민들이 외우기 쉽도록 도모한 것이다. 후에 토정 이지함(1517-1578, 李之菡)이 보다 정교화하여 노랫말로 남겼다고 한다.

초사흘은 토끼 때요 다음 사흘은 용 때이고 / 三兎三龍水
사흘은 뱀 때요 하루는 말 때이며 / 三蛇一馬嘶
양 때도 세 번 잔나비 때도 두 번인데 / 羊三猿亦二
달이 기운 후에도 이와 같다 / 月黑復如斯

해석하면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를 1주기로 하여 16일부터 그믐까지 되풀이되는 조강의 밀물은 “1일에서 3일까지 3일간은 卯時(오전 5~7시, 토끼)에 들고, 4일에서 6일까지 3일간은 辰時(오전 7~9, 용), 7일에서 9일까지 3일간은 巳時(오전 9~11시, 뱀), 10일 하루는 午時(오전 11시~오후 1시, 말), 11일에서 13일까지 3일간은 未時(오후 1~3, 양), 14일에서 15일까지 2일간은 申時(오후 3~5시, 잔나비)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이 시를 통해 한강 조수간만의 기준이 된 조강 유역의 유례없는 조차, 그리고 물 때(滿潮)를 기다려 거센 기세로 밀어닥치는 밀물의 파장을 따라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했던 뱃사람들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다.

조강 너머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북녘 땅처럼, 각종 문헌에 등장하고 있는 조강포구의 옛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하다. 전하는 이야기들만큼 다양한 역사지리적 자산들과 문화적 잠재력을 품고 있는 조강. 김포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하루빨리 되찾아야할 과거이자, 통일을 준비하며 가장 주목해야 할 김포의 미래이다.

박형숙
김포문화재단
문화유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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