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의 비밀

우리나라 역사에서 독립이라는 말이 처음 쓰여 지기는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洪範)14조"에서였지 않았나 싶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이 제2차 내정개혁의 추진을 서약하는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을 발표하면서 부터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천명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청나라로부터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철저한 일본의 계략도 배후에는 없지 않았다. 그 뒤 독립이란 말은 개화파의 거두로 미국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서재필로 부터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96년 4월에 <독립신문> 발간을 시작으로 7월에는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11월에는 서울 서대문 밖에 수치스럽게 서있는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1897년 8월 조선은 비로소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제정하고 1898년 5월에는 모화관(慕華館)을 개조하여 독립관을 개설하였다.

독립협회의 청년지도자로서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맹렬한 활동을 펼친 이승만은 반역음모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있으면서 <독립정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하였다. 옥중기라고 해도 좋을 그 저술은 1894년의 청일 전쟁에 이어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의 독립이 유명무실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 속에서 간수들의 눈을 피해 집필된 것이다. 감옥생활 7년째에 접어 든 해였다.

무력독립투쟁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 이를 실천에 옮겼던 애국지사 박용만이 1905년 이 글의 원본을 트렁크 밑바닥에 감추어 미국으로 가져와 1909년 1월에서야 출판되었다. 그 <독립정신> 초판본 서문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일본인들이 한국에 멸종주의를 쓰며 난리인즉 한국인이 이것을 알아야 능히 면할 게제가 생길 것이요 한국인에게 이것을 알려주려면 독립정신을 권하는 것보다 더 긴한 글이 없다~.” 이에 이어 박용만은 이런 후서(後書)를 썼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산다고 하니~비록 나라는 망하였어도 그 나라 백성의 독립정신만 완전하면 결코 아주 망하지 않을 지라. ~이제 이학사 승만씨가 쓴 독립정신이 세상에 나오니 이는 우리 4천년 역사에 처음으로 부르는 소리요 또한 처음으로 듣는 소리인지라~>”

이로부터 10년 뒤 우리는 독립선언서를 만난다. 그사이 숱한 의병활동이 일어났고 순국열사와 의사들이 줄을 이었다. 그런 일이 있거나 말거나 막무가내로 한일합방은 일본 측의 계략대로 진행되었다. 1919년 정월이 되자 일본에 유학하면서 한일 합방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계획한다는 소문과 함께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서 초안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오랫동안 독립운동의 기회를 탐색하던 애국지사들이 이 소식에 접하자 그들의 마음속에 불같은 열기가 끓어올랐다. 그때 마침 헤이그 밀사 사건에 책임을 지고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고종이 아무 이유 없이 별안간 승하하였다. 독립선언의 기회는 바로 이때다 하고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들이 모여 3.1운동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자신은 학자로 일생을 살고 싶을 뿐이기에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의 전면에는 절대 나서지 않겠다는 최남선이 동경의 2.8선언을 보자 선뜻 자신이 선언서를 쓰겠다고 자원하는 손을 들었다. 이어 만해 한용운도 독립선언문의 작성은 자신의 몫이라고 나섰으나 결국은 최남선이 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문은 각기 이렇게 시작된다.

2·8선언: “조선 청년독립단은 아(俄)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자(玆)에 오족(吾族)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자결의 기회를 여(與)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不然)이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위를 취하여 써 독립을 기성하기를 이에 선언하노라”

3·1독립선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克明)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誥)하여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永有)케 하노라~~천백세 조령(祖靈)이 오등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 기운이 오등을 외호(外護)하나니 착수가 곧 성공이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으로 맥진(驀進)할 따름인뎌.”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前文)에서 바로 이 3.1독립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라임을 선언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우연히 독립한 나라도 아니요 연합국의 승리로 주어진 나라도 아니라는 얘기다. 독립운동을 통해 건립된 나라라는 얘기다.

3.1운동의 과정과 독립의 역사를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은 장석주의 시(詩) “대추 한 알”에 모여진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혼자서 둥글어 질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참으로 그렇다. 3.1운동의 과정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태풍과 천둥과 벼락을 겼었겠는가? 무서리 내리는 밤과 땡볕이 내리 쬐는 한여름은 또 얼마나 겪었을까? 손병희는 을사오적으로 첫 번째 가는 매국노인 이완용까지를 이 운동에 가담시키기 위해 그를 만나 거사계획을 설명하였다. 이완용은 이 계획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으나 총독부에 밀고는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면서 악질형사로 소문난 신승희라는 사람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현장을 적발하였다. 경찰에 보고하였으면 어쩌면 특진에 특진을 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급힌 김에 인쇄소 현장에서 누군가가 건네준 돈 몇 푼을 받고 그는 끝내 보고하지 않았다. 대추 한 알이라도 저절로 붉어 질 리 없고 혼자서 둥글어 질 리 없는 이치가 생생히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태화관과 독립선언서의 만남도 실로 우연한 일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태화관은 본래 이완용의 저택이었다. 매국노에게 내려진 하늘의 벌인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에 그 집 정원에 있는 나무 한그루가 벼락에 맞았다. 본인도 그것이 꺼림직 하였던지 자신의 저택을 팔려고 내놓았으나 벼락맞은 매국노의 집을 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 화재를 만나 영업할 집이 필요 했던 명월관주인이 이집을 사들여 별채의 영업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벼락 맞은 매국노의 집에서 독립을 선포하는 의식이야 말로 얼마나 통쾌하게 느껴졌겠는가? 이 또한 대추 한 알이 간직한 비밀이 엿보이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자라는 학생 누구에게도 독립선언서를 읽어 보도록 권하는 학교도 스승도 없으니 대추 한 알의 비밀을 누가 짐작이나 할 것인가

농암 김중위
시인.수필가.
前 사상계편집장. 4선의원.
환경부장관.
UN환경계획 한국부총재.
헌정회 영토문제 특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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