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부리 영감의 김포 이야기] 유산 소송 <23>

이 집안 어른과의 약속대로 마지막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재산이 적으면 후손들에게 남길 것이 없어 다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으면 형제간에 의를 상하기 쉽다는 말로 꾸미기로 했습니다. 초청한 양반님 말씀으로는 자신이 죽으면 많은 재산을 놔두고 다툼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민담을 어떻게 효과있게 요리할 수 있을까 고심했습니다.

“옛날에, 아니 김포 건너 황해도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댁 주인처럼 논밭이 많은 대지주이면서 포구에서 꽃게와 조기를 전국으로 파는 상인이 살았습니다.”
횃불 아래로 큼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양반과 평민의 신분만 다르지 경제상황은 자기 집안과 비슷하다는 마음이 들었나 봅니다.

“처음에 얻은 자손이 딸인데 사내처럼 활발한데다 영특해서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하는 장사를 도와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흠이 있다면 욕심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대를 이을 아들을 기다리다가 딸이 시집갈 나이쯤에서야 비로소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집안에 경사가 났지만, 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다가 사내 동생이 태어나자 불안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많은 재산이 자기 앞으로 될 것인데 그렇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성격 그대로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곱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걱정하는데 아들의 나이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이승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관심은 그 많은 재산이 과연 누구에게 돌아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는 시집간 딸에게도 재산을 반반 갈라줄 것이다, 아니다. 모두 아들에게 돌아갈 것이다하고 말이 많았습니다. 드디어 부자의 장례가 끝나서 유서를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인 사람들도 몹시 궁금했던 것입니다.

“유서에는 모든 재산을 딸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아들에게는 초가집 한 채와 낡은 궤짝 하나와 논 한 마지기였습니다.”
두고 보자고 벼르고 있던 딸은 그제야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장 동생을 초가집으로 쫓아냈습니다. 부잣집 외아들로 어려움 없이 자라던 아들은 그날부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겨우겨우 연명하던 아들과 달리 딸은 남편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크게 불리고 있었습니다. 친동생임에도 모른 체하고 내버려두며 몇 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의 처사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장가도 못 간 아들은 낡은 궤짝 위에 써진 글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열여덟 살 후에 고을에 현명한 원님이 오시면 이 궤짝을 열어보도록 해라!”
아들은 궤짝에 보물이 감춰져 있는 것으로 믿고 참고 기다리다가 새로 부임하는 원님이 매우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궤짝을 열었습니다. 기대와 달리 보물은 없고 초상났을 때 입는 흰 도포와 흰 갓, 미투리 그리고 흰 종이와 붓이 벼루와 함께 있었습니다. 낙담한 그는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흰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다음에 빈 종이와 붓, 벼루 등을 들고 원님을 찾아갔습니다. 난감한 것은 신임 사또입니다. 이것에 무슨 뜻일까 고심했습니다.

이방을 불러 집안 사정을 들은 원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은 포구의 대상이 된 누나와 매형을 불렀습니다. 이 기이한 소송을 들은 백성이 모인 가운데 원님이 판결했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욕심 많은 딸이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동생을 해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대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고소한 나이가 되면 초상날 때 나누지 못한 상속을 원님에게 해결해 달라고 청원하라는 것은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원님의 중재로 딸은 재산을 나누어 동생에게 주었다고 한다는 것으로 재담을 끝냈습니다.

최영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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