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소통疏通'이 안 된다고들 하는데…
'小通'일 뿐이야, 笑痛?같은 소리, 이 바보야!

최창섭
서강대학교
명예 교수
작금 우리 사회의 큰 문젯거리 하나를 대라면 많은 이들이 서슴없이 '소통'이 안 된다는 지적을 할 거라 본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학교, 직장, 각급 모임과 정치판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어디나 한결같이 소통이 안 된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이 안 통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이 바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공동체에 바탕을 둔 '人間'이 아니던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말'을 통한 대화요 영어로는 이를 커뮤니케이션이라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뿌리인 라틴어를 추적하면 "너와 나가 하나 되기 위한 끊임없는 '나눔'(sharing)의 과정"이라 명시하고 있다.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어느 모임이나 공동체도 발전은커녕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지게 마련이다.

특히 근자에 여기저기서 '소통 부재'에 따른 문제점에 대한 화두가 자주 주제로 오르곤 한다. 대통령이 이 지경에 까지 이른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소통부재에 따른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라 본다. 단, 조그마한 토를 하난 덧붙인다면 소통 부재가 유독 청와대만의 문제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비단 청와대라는 조직뿐 아니라 각급 정부의 행정부서와 국회 정치판에서부터 지자체에 이르는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이르는 국민 백성과의 격의 없는 소통 채널이 철저히 닫혀있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유의해야 할 점은 소통 부재가 공공기관이나 정치판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 구석에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각자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면 쉽사리 비슷한 현상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단합대회랍시고 가면 으레 속칭 목소리 '센 놈'이 판을 장악하고 혹 다른 의견(different)이나 반대의견이 나오면 곧 나가라('out')고 아우성 판이 벌어지곤 한다. 허심탄회한 나눔의 자리라 해놓고 막상 가서 다른 의견이라도 피력하는 순간 적이 되어버린다.  남의 다른 의견이나 목소리를 배척하면서 '끼리끼리'’ 의식으로 똘똘 뭉쳐가면서 이견을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몰아가는 소통 부재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간, 직장에서도 상사와 직원들 간, 정부에서도 상명하복의 일사불란 체계 속에 배타적 끼리끼리 문화가 팽대해 있는 현실이 끔찍스럽다고나 할까.

소위 다양성 속의 조화라는 표현이 어색하기만 한 우리 현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서로 달라야만 한다. 여자와 남자 서로 다르므로 결혼을 통해 자녀를 낳고 키우는 가정을 이뤄가듯. 같은 맥락에서 양복의 단추끼리는 서로 만날 수 없고, 단추는 단춧구멍과 짝을 이루며 멋을 창출해내지 않는가. 전 세계의 다른 민족과 문화가 서로 잘 어우러진 용광로(melting pot)로 멋있는 조화를 창출해낸 세계 대국인 미국이야말로 서로 다른 州가 조합을 이룬 [United States]가 아니던가. 

어찌 보면 이번 대통령 탄핵사태까지 이르게 된 근본 원인은 ‘소통 부재’와 그에 따른 ‘획일주의’였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정도로 명약관화한 인과응보라 할 수 있겠다. 이명박 정부 시절 한때 청와대에 국민소통 담당 수석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도 국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국민대통합위원회'도 발족시킨 바 있다. 그러나 결과는 그야말로 '뻔할 뻔 자' 아니던가. 소통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전문가랍시고 앉혀놓고 소수의 사람과만 통하는 '小通' 소통하다 보니 결과는… 그들 관료를 만나보면 한결같이 전국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 만나고 왔다고 떠벌린다. 듣고 보면 실체로는 그 지역 몇몇 힘깨나 쓰는 소수 속칭 유지들과 회식 정도 하고 마치 대단한 '소통'의 성과를 올린 듯 자랑하는 꼴불견들! 한마디로 笑痛이라고나 할까요? = 해학이요 시니컬한 아픔이죠.

소통은 소수와만 통하는 게 아닌 다수 대중 국민과의 허심탄회한 끊임없는 나눔의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대통합의 길인 것이다. 방법은 무궁무진. 라디오 시절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변정담'(fireside chat)을 통해 끊임없는 국민과의 대화채널을 열어놓은 바 있다. 오늘날 널려있는 인터넷부터 시작해서 카톡, 밴드, facebook 등 많은 follower를 이끌 수 있다. 흔한 북 콘서트 형태도 좋고, 지역마다 '한마당' 축제를 펼쳐도 좋고. 질의응답을 동반한 언론대담 등 그 과정에서 당연히 다양한 의견개진과 견해차를 통한 진통도 있을 것이나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은 상대방에 대한 다른 의견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서로 간에 이해와 포용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엄청난 인고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코, 일사불란 한 결과를 빨리 도출해내려는 상대방에 대한 강요(coerciveness)가 아닌 오랜 설득(persuasion)의 과정에서만 얻어지는 값진 양보와 이해를 향한 민주적인 대화와 수사학(rhetoric)의 길이어야 한다.

소통은 내가 말하기보다 오히려 듣는 길이어야 한다. 내가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설득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상대방의 얘기에 귀 기울여주며 귀담아듣는 경청(傾聽)의 자세를 보여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 하는 길이 아닐는지. 두 번 얘기하려는 조급함보다 두 번 듣고 한 번 정도 응답하려는 자세에서 상대방을 포용하고 끌어들이는 진정한 소통(疏通)문화를 그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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