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찬소설가

효(孝)는 조선 시대에 가장 큰 덕목이었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화하기 위해 효를 장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요즘 부모님이 해외 여행가면 돈을 보태주지 못할망정 저 돈이 다 내건데 낭비한다고 한다지요? 열심히 돈번 아버지, 예순을 넘기고 돌아가시기 바란다지요? 이런 못된 놈들이 있습니까. 북극의 에스키모는 나이 먹어 사냥을 못하게 되면 잡은 동물의 가죽을 이빨로 무두질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이가상해 더 할 수 없으면 밤에 몰래 나가 곰의 밥이 되기를 자청한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식량이 부족하면 늙은 부모를 산에 버렸다고 합니다만…… 이야기 시작합니다.

평생 불한당으로 살아온 아들이 치매 걸린 노모가 꼴 보기 싫다고 산에다 버릴 마음을 먹었습니다. 엿 하나로 꼬여 지게에다 얹힌 다음 아들에게 산에다 지게째 버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눈을 부라리며 호통치자 아들은 할 수 없이 할머니가 올라탄 지게를 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참 만에 아들이 돌아와 지게를 담에 세우는 것을 보고 야단을 쳤습니다. 지게는 왜 가지고 오냐고. 그러자 아들이 대꾸했습니다. 아버지가 늙어 거동을 못하면 다시 쓰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정신이 번쩍난 불한당은 아들에게 사과하고 산으로가서 모셔왔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비를 가르친 거죠.

예조판서를 지낸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의 업적은 효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평생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몇백 년 후에 길에다 늙은 부모를 버리다 못해 필리핀 여행 가자고 꼬여 낯선 곳에 버리는 천하에 죽일 놈들도 생긴 것을 알면 기절했겠지요. 어쨌든 판서 자리를 물러난 뒤에 효자 효녀의 사례를 찾기 위해 유람을 떠났습니다. 지금과 달리 여관이 없었고 어느 집에 들어가도 먹여주고 재워주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 출신인 판서는 김포 땅에 들어서자 넓은 평야를 보고 새삼 감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큰집을 보고 찾아가 하루 묵을 청했습니다. 젊다 못해 새파란 나이의 주인은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겸상한 저녁 식사도 푸짐해서 매우 흐뭇했습니다. 밥상을 물리자 주인은 오늘이 전염병으로 한날한시에 돌아가신 부모님 제사라고 했습니다. 판서는 예의바르고 인정 많은 젊은이의 제사지내는 것을 훔쳐보기로 했습니다. 지방마다 지내는법이 다르니까요.

방문을 살짝 열고 마루를 바라보니 부잣집답게 제사상에는 각종 음식과 과일이 풍성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의관을 갖춰 입은 젊은이가 나오자 그 뒤로 곱게 차려입은 새댁이 뒤따라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여자가 제례에 참여하는 예가 없기에 판서께서는 궁금했습니다. 제사도 축문 읽고 절을 하지않았습니다. 젊은 주인은 마치 부모님이 바로 눈앞에 살아 있는 것처럼 젓가락으로 반찬을 위패 앞에 놓고 공손하게 말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햅쌀로 지은 밥입니다. 요기 나물은 며느리가 무친 것이고 조기는 법성포에서 사온 것이니 맛있게 드십시오. 목메십니다. 천천히 드십시오.”
예조판서께서는 더욱 호기심이 일어났습니다.
“올해 농사는 대풍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늘 하신 대로 가난한 산모에게 쌀 한 말과 미역 한 축을 보냈습니다. 어머님이 늘 하신 대로 용화사에는 쌀 다섯가마도 보냈습니다.”
사랑방에서 아버지에게 살림살이를 보고하듯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말을 마친 다음에는 방에서 원앙금침을 가져와 제사상 앞에 깔았습니다.
“아니, 저건 또 무슨 행위 보따리인고?”
판서가 의아해하는데 젊은 주인은 의관을 벗고 옷을 벗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같이 제사를 지내던 새댁도 옷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판서는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엄숙해야 할 제사에 무슨 해괴한 짓이라는 말입니까?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