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창수
민족사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을 직접 비교할 만한 근거는 많지 않다. 유골의 평균으로 따져볼 때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은 오늘날의 인류보다 약간 더 컸다. 1800cc~2000cc에 이른다. 뇌 과학자들은 인간의 경우 지능이 높을수록 대개 두개골이 크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물론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호모사피엔스가 1200cc~1300cc에 불과하므로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이 얼마나 더 컸는지 알 수 있다. 체격도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훨씬 더 크고 우람했다. 그렇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를 사냥해서 식용으로 삼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브라이언 페이건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들이 메머드·들소·얼룩말과 같은 초식동물을 사냥해 얻은 고기로 식생을 삼았던 사실은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이 시기 호모 사피엔스는 물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조개를 식생으로삼고 있었다. 따라서 두 집단 식생의 특징을 비교해보면 두 비교 집단 간 문화적 수준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활과 화살도 없던 시절 인간이 창만 가지고 메머드·들소·얼룩말 같은 덩치 큰 초식동물을 사냥하려면 협동을 통한 역할 분담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공동체 전체가 어떤 형태로든 역할을 분담했기 때문에 덩치 큰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이 창만 들고 홀로 덩치 큰 초식동물을 사냥한다는것은 무모한 도전이다. 따라서 식생으로 볼 때 네안데르탈 집단에 사냥과 관련된 협동의 문화가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호모 사피엔스의 식생은 물가에 지천으로 널린 조개다. 원시의 해변이나 강변에는 어른들의 손바닥보다 큰 조개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조개들은 동작이 느려 도망을 못 친다. 이 식생은 무기도 협동도 필요 없다. 단지 손발만 멀쩡하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포식할 수 있다.

이렇게 식생만 비교해도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에게 비교의 상대가못된다. 전 회에 소개한 조선일보 이영완 기자의 기사에는 “네안데르탈인이 12만 년 전부터 자작나무 수액을 불로 끓여 돌날을 창에 붙이는 풀로 썼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시기의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문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이렇게 진실에 반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왜 이렇게 진실에 반하는 것이 많을까? 그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판단하려는 본능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우리 인류와 무관한 별개의 종이라고 생각했고, 호모사피엔스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여 편견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백이 흑이 되고, 흑이 백이 되는 진실의 전도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우리는 갈릴레오갈릴레이(1564~1642년)가 겪어야 했던 참혹한 경험에 귀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지동설은 불변하는 진리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지지한 죄로 겪어야 했던 고초는 끔찍했다. 세상 사람들은 갈릴레이가 단지 로마의 이단 심문소에서 지동설을 부인한 후 법정 문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것만 기억한다. 이 사건으로 갈릴레이 가정에는 엄청난 풍파가 몰아닥쳤다. 그는 직장을 잃고 피렌체 교외 알체토리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사랑하던 장녀가 죽었고, 상심 끝에 시력마저 극도로 나빠졌다.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연구에 힘썼지만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로마교황청은 갈릴레이가 공적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도 묘소를 쓰는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로마 교황청이 갈릴레이 사후에까지 보복을 했던 것이다. 종교는 이렇게 무섭다. 종교는 진리보다 교리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종교는 도처에서 인문학의 목을 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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