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찬소설가
구연가로 이름이 알려지자 김포 분들이 제게 ‘재담꾼 풍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어른을 대상으로 하니 쌀이나 잡곡을 들어오는 바람에 살림도 폈습니다. 내가 막 입을 떼는데 맨 뒤에 앉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패랭이를 쓰고 가짜 수염으로 변장했지만 저는 대번 그가 염라대왕임을 알아챘습니다. 재담에서 미래를 꿰뚫는 소문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오금이 저렸지만, 참고입을 떼었습니다. 우선 혹을 툭툭 손으로 칩니다.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저장된 것이 아니라 혹으로 나오는 것임을 과시하는 일종의 의식이지요.
“에, 또. 어떤 부자가 친구 집에 갔더니 새로 병풍을 만들어 멋진 글을 써놓고는 자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야기속 부자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지만, 열심히 돈을 벌어 떵떵거리게 되었습니다. 떵떵거린다는 것은 가끔 장고치며 놀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그가 돈만 있는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병풍에 글씨를 쓸 명필가를 구했습니다. 몇 명이 찾아왔지만, 그들이 쓴 글씨가 명필이라고 볼 수 없기에 퇴짜를 놓았습니다. 얼마 지나자 오른팔을 붕대로 감은 선비가 나타나 자신이 쓴 글씨를 내밀었습니다. 찢어진 갓에 남루한 옷차림이었지만 무식한 부자가 보아도 명필가가 틀림없었습니다.
“내가 산에 들어가 붓글씨를 많이 쓰다 팔을 다쳤소. 이곳에서 머물며 손이 나으면 그때 글씨를 쓰리다. 한 달만 시간을 주시오.”
부자는 오케이했지요. 그리고는 명필가가 쓴 종이를 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소문을 냈습니다. 자칭 선비는 사실 글씨라고는 써 본 적도 없는 걸인이었습니다. 어쩌다 당대의 명필가인 한석봉이 연습하고 버린 종이를 주워 가지고 온 것입니다.
‘당분간 굶은 일은 없겠구나.’
술에 취해 쓰러진 선비의 옷을 벗겨 입은 가짜 명필가께서는 보름 동안 호화판으로 얻어먹었습니다. 기회를 봐서 야반도주하려고 했지만, 방문 앞에는 커다란 진돗개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동네 졸부들이 너도나도 병풍을 마련하고 명필가를 모셔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고, 큰일 났네.’
뒷간을 가도 진돗개가 슬금슬금 쫓아오니 도망치기는 틀렸습니다. 에라, 모르겠다고 하고는 방안에 틀어박혀 부자가 마련한 붓과 벼루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때 되면 밥 먹고 이러기를 보름이 지났습니다. 부자는 한 달이 가까워지자 글쓰기를 재촉했습니다. 할 수 없이 손을 감싼 붕대를 푼 명필가는 붓을 들고 먹을 듬뿍 묻혔습니다. 그리고는 병풍 앞에 섰습니다. 문틈으로 안을 엿보던 부자도 가슴을 두근거렸습니다. 명필가이니
한 달 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글귀를 휘갈겨 쓸 것을 기대했습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말입니다.
붓을 든 명필가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는 순간 부자는 악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병풍 시작에서 끝까지 붓으로 한일(一)자를 긋고는 푹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급히 문을 열고 들어가 살펴보니 명필가는 붓을 손에 든 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난데없이 송장치우게 되었는데 몇몇 사람이 죽은 이가 명필가가 아니라 밥 빌어먹는 걸인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한 달 식비에 초상까지 치르게 되었고 더럽혀진 병풍은 창고 속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밤이면 창고 안에서한 줄기 빛이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술사들이 이 집에 몰려와 창고 안의 보물을 보자고 졸랐습니다. 부자는 영문을 몰랐지만, 창고 문을 여니 빛이 병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술사들이 말합니다. “이 병풍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천하의 보물입니다. 목숨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가짜가 한 달 동안 병풍에 어떻게 글씨를 쓸까 고민하니 붓끝에 혼이 담겼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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