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앞쪽으로 작은 산이 있습니다. 마을 안에 있다고 해서 안산으로 불리지요. 안산이라는 이름은 편안한 산이라는 말인 것도 같고 별명인 것도 같습니다. 제 눈에는 안산이 작은 노적봉처럼 보여요. 작은 만큼 정겨운 산입니다. 요즘은 하루에 한 번씩 그 산에 올라가요. 산에 갈 때마다 저는 등산화를 신어요. 가죽으로 만들어진 등산화는 혹시 뱀을 만날까 싶어서 신는 것이지만 아직까지 뱀을 만난 적은 없어요. 목에 수건을 두르고 모자를 쓰면 꽃가루를 뒤집어쓸 염려도 없어요. 완전 무장을 하고 산에 오르는 셈이지요.
오늘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혼자서만 산에 다니기냐고, 단체로 가자고 해요. 윗집 아주머니는 같이 모여서 녹차 마시는 자신들을 녹차 회원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회원들 네 명이 산에 가게 되었습니다. 계란을 15개 삶고 각각의 병에 매실 주스를 채웠어요. 새참거리를 배낭에 넣고 집을 나서니 휘파람이 절로 납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산에 오르면 적당한 운동도 되고 겨울에 먹을 고사리도 딸수 있으니 즐거운 일이지요. 산에는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피어나고 있어요. 안산 양지 바른 곳마다 무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덤 뒤쪽을 둘러싼 언덕 같은 것이 있는데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등에 땀이 흘러요. 고사리는 죽은 소나무를 모아 놓은 곳에서 많이 납니다. 언젠가 안산에 불이 났다고 해요. 불에 탄 소나무를 베어 길게 쌓아 놓은 곳이 여럿 있는데 그 주변에 고사리가 많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안산이 민둥산이 되자 고사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해요. 고사리는 생태 복원 능력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죽은 소나무는 거름을 만들어 주고 고사리는 비어 있는 산등성이를 푸르게 덮어 줍니다. 죽은 소나무와 고사리 사이에 어떤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산이 고사리로 유명해지자 인근 마을 주민들이 고사리를 따기 위해 몰려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곳에도 고사리는 있어요. 고사리는 생존을 위해 보호색을 띱니다. 양지 바른 곳에 푸른 줄기가 많은 잡목들이 있으면 고사리도 푸른빛을 띠어요. 갈색 나뭇가지가 많은 숲 그늘에는 나무 줄기와 구분할 수 없는 갈색을 띤 고사리가 나와요.
숨은 그림 찾기처럼 위장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지나간 곳에도 고사리가 남아 있지요. 고사리를 따려면 작년에 죽은 고사리 나무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의 고사리가 있으면 주변에 다른 고사리가 있을 확률이 높지요. 고사리를 발견하고 그 주변을 차분하게 살펴보면 뜻밖에 많은 고사리를 따는 수가 있습니다. 시각의 방향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니 남들이 지나간 곳에도 고사리는 있지요. 고사리는 따면서 끝을 손으로 문질러 놓아야 해요. 시간이 지나면 곧 쇠게 되거든요. 집에 돌아가는 즉시 삶아 널어야 부드러운 고사리를 먹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빠트리고 간 고사리를 따라 다니다 보면 산 정상에 이르게 됩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무덤이 엉뚱해 보입니다. 햇볕이 잘 드는 무덤 주변에 잔디가 파랗게 깔려 있어요.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 싸 가지고 간 새참을 펼쳐 놓았어요.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딴 고사리가 많다고 자랑을 합니다. 은행나무 집 며느리는 모자가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다녀서 놀림을 받습니다. 상쾌한 바람에 땀을 들이는 동안 기분도 상쾌해져요. 야호 하고 소리도 쳐보고 노래도 불러봅니다. 그곳에 서 있으면 마을이 한눈에 보여요. 우리 집 마당에 피어난 철쭉도 선명하게 보이지요.
혼자 다닐 때는 뱀이 나올까 무서워서 훤히 보이는 길로만 다녔는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으니 용감해져서 덤불 속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다리가 아픈 신풍 할머니는 한 곳에서만 맴돌아요. 질 박을라고 나왔는디 참말로 심드네잉. 신풍 할머니가 잔디에 주저 앉으며 말합니다.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일하러 나가는 것을 길 박는다고 하거든요. 고사리 따러 나온 할머니는 길을 닦는 셈이지요.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만 가자고 크게 소리치고 할머니와 함께 산을 나왔어요. 등이 땀에 젖어 축축합니다. 힘은 좀 들었지만 마음만은 가뿐합니다.
샤워를 하고 마루에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어요. 윗집 아주머니는 오이 재배하는 이웃 마을에서 오이를 가져왔다며 나눠가라고 상자째 들고 옵니다. 녹차를 우려 마시며 내일은 무슨 새참거리를 가지고 갈까 의견이 분분합니다. 은행나무 집 며느리는 산에 가지 말고 읍내에 나가서 생선회도 먹고 노래방에도 가자고 해요. 신풍 할머니는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수가 없는지 음음 하면서 말을 고르다 그만둡니다. 그 사이에도 저는 고사리를 데쳤어요. 마당에 놓은 탁자에 두 개의 채반을 올려놓았어요. 사람들이 결론 없이 흩어지고 저는 마루에 앉아 채반 가득 널려 있는 고사리를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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