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저 작


드디어 소쩍새가 왔어요. 봄이 되면서 저는 은근히 소쩍새 소리를 기다려 왔거든요. 일년 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듯 소쩍새 소리가 반갑습니다. 봄이 오면 모든 새소리들이 아름다워져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산까치와 직박구리의 소리도 봄에는 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변하지요. 제가 사는 산골은 그리 깊은 골짜기가 아닌데 많은 새들이 삽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찾아오는 철새들은 반가운 손님이지요. 벌써 제비와 동박새도 찾아왔어요. 봄은 이른바 새들의 짝짓기 계절이에요. 텃새와 철새들이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지요. 새봄을 맞아 짝을 부르는 새들의 몸짓은 환희의 오페라입니다.
소쩍새를 접동새, 두견새라고도 하지요. 그렇게 이름이 많은 것을 보면 소쩍새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나 봐요. 고요한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 외로움도 한결 견딜 만합니다.
저는 20년 넘도록 밤에 잠들지 못하는 버릇이 들었어요. 어렷을 적에는 밤새워 책을 읽었으면 하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럴 수 없는 환경과 부모님의 성화에 얼마나 많은 밤을 서러워했는지… 독립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밤을 새우는 것이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다행해 남편은 제 취향을 이해해 줬어요. 저는 밤에 자지 않고 온갖 쓸데없는 일과 쓸데 있는 일을 합니다. 빨래도 밤에 하고, 음식도 밤에 만들고, 책도 읽고, 뜨개질도 하지요.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해요. 낮에는 피곤에 지쳐 시들시들하다가도 어둠이 오고 밤이 깊어지면 눈이 말똥말똥해지고 활력이 솟아요.
밤 시간대는 낮에 비해서 농밀하고 은밀한 그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밤에는 낮에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냄새도 다르고 소리도 다르고 촉감도 다르고 감상도 달라요. 저는 오감을 움직이며 밤의 기운을 만끽합니다. 소쩍새 소리는 달콤한 음악이지요. 심장박동처럼 소쩍소쩍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면 어떤 친구보다 마음이 든든해요.
옛날, 시집살이하는 어떤 새댁이 있었대요. 시어머니가 내어 준 솥으로 밥을 지으면 꼭 며느리가 먹을 만큼씩만 밥이 모자랐답니다. 배고파 죽은 며느리의 넋이 소쩍새가 되어 밤마다 솥이 적다고 솥적솥적 울어댄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배고픈 시절을 겪었으면 그런 전설을 만들어 냈겠어요? 솥이 적다고 울어댄다는 소쩍새 전설보다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심정이 더 애달픈 것 아니겠어요?
소쩍새가 봄부터 가을까지 우는 것을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런 것 같습니다. 소쩍새가 봄부터 그리 우는 것은 아무려나 무슨 뜻이 있긴 있는 것 같아요. 국화를 비롯해서 모든 식물들은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에 자지 않고 성장합니다. 한낮의 소란이 잠든 밤은 식물에게 더욱 요긴한 시간인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밤에 깨어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저는 식물로 치자면 음지식물이거나 야행성일까요? 사람들은 밤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밤하늘을 검정으로 칠하지요. 하지만 저는 밤의 색깔을 빨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은 아침에 떠오를 해를 품고 있는 어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뒤집으면 더욱 밝음이 됩니다. 저는 어둠 그 너머에 있는 밝음을 보기 위해 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쩍새처럼.
소쩍새는 봄부터 가을까지 집요하게 울어댑니다. 정말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울어대는 것인지 모르지만 소쩍새는 국화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목표를 세우면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챙겨야 하는 인간의 속성과는 사뭇 다르지요.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쩍새는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천연 기념물은 안타깝게 사라지는 것에 붙이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밤을 지새우며 천연 기념물이 되어 버린 소쩍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합니다. 안타깝게 짧은 밤도 천연기념물일 수 있겠지요. 소쩍새와 공유할 수 있는 수많은 밤들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합니다. 혼자 우는 저 소쩍새가 짝을 만나 서로 화답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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