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희저 작
아침에 마루 쪽으로 난 문을 열어보니 강한 향기가 날아왔습니다. 매화 향기보다 훨씬 강한 향이었지요. 마루 위를 보니 조그만 화분에 키 작은 천리향이 꽃을 매달고 있었어요. 천리향은 서향이라는 나무의 별명입니다. 향기가 어찌나 강한지 천리까지 날아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이름에 걸맞은 꽃이라는 생각도 들고, 별명치고는 아주 과장된 별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언제부턴가 천리향을 키웠는데 쭉쭉 잘 자라더군요. 키도 커지고 가지고 마냥 뻗어서 가지치기를 해야 할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작년 봄, 꽃을 피웠다 진 나무가 조금씩 이상해지는 거예요. 이파리가 말려 올라가고 색깔도 노랗더군요. 원예 전문가에게 물어봤더니 천리향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라고 했어요. 나무를 뽑는 도리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무에 너무 정이 들어서 그대로 말라죽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은 아쉬움이 들었어요. 가지 끝을 조그맣게 잘라 삽목을 했습니다.
포토에 심었는데 뿌리가 난 것을 확인하고 조그만 화분에 옮겨 놓았어요. 그렇게 키운 천리향이 두 무더기의 꽃을 달고 피어난 것입니다. 저는 샘가 모퉁이에 놓아둔 그 작은 나무를 잊고 있었는데 꽃이 피어나니 남편이 저를 위해 마루에 올려다 놓은 꽃을 볼 때마다 별 모양의 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꽃색은 짙은 자주색이지요. 꽃잎이 두껍고 투박해서 얼른 보면 조화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지난 화이트데이에 남편이 사탕을 함께 봄기운을 맛보라며 선물해 준 프리지어는 시들기도 했지만 천리향의 위용에 마당으로 던져지는 운명이 되었어요.
저는 후각이 예민한 편입니다.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동안 향기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잠을 잘 때에는 국화꽃 넣은 베개를 베고 잡니다. 국화 향기를 맡으며 잠들면 어딘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고 잠이 잘 오는 것 같아요. 음식을 할 때에도 재료의 고유한 냄새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음식에 화학 조미료나 소금을 잘 쓰지 않아요. 음식을 할 때에도 재료의 고유한 냄새를 최대한 살리려면 간을 약하게 해야 합니다. 짠맛이 강하면 음식 맛이 아니라 짠맛을 먹는 것이 되지요. 절 집에 사는 스님들은 음식을 싱겁게 만들어 먹음으로 해서 수양을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절밥이 맛깔스럽다고 하면서 그 이유가 싱거운 맛에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사용하는 조미료는 직접 만든 생강가루, 멸치가루, 버섯가루 등입니다. 인공 감미료나 화학 조미료를 넣어 만든 음식. 어쩐지 인생도 그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진실이나 아름다움을 평가하고 존중하는 잣대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그 사람을 떠받치고 있는 배경이니 학벌이니 하는 것들이 우선시 되지요. 그런 것들이 모두 인공 감미료나 화학 조미료에 해당하는 조건 아닌가요? 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어떤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천리나 백리까지 향기를 풍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악취는 풍기는 인생은 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별 모양의 종이 다닥다닥 모여 활짝 펴져 있거나 오므리고 있는 형상으로 피어난 천리향 송이 송이가 제 가슴에 종을 칩니다. 향기로운 인생이 되어라. 뎅뎅.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라 뎅뎅. 기왕에 시작한 인생이니 보람을 찾아라 뎅뎅. 쓸모 없는 인간이 되지 말아라 뎅뎅.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마라. 뎅 뎅. 네 몸이 세상을 정화할 수 있는 체가 되어라 뎅뎅. 천리향 송이송이 종소리가 더욱 크게, 더욱 거세게 내 가슴을 후려칩니다.
사람들이 옛날부터 뜰안에 꽃을 가꾸게 된 연유가 그런 것 아닐까요? 꽃 향에 스며있는 기(氣)는 분명 예사로운 것은 아닐 테지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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