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니틀

▲ 벽동 이도행소설가

예전의 겨울철 농촌 풍경 중 일부에서는 나름대로 새끼줄을 꼬거나 가마니를 짜면서 바쁜 일손을 놀렸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일손을 놓고 화투나 뒤적이며 무위도식했다. 사랑방이 젊은 일꾼들의 즐거운 일터라면 더러는 노름과 잡담으로 밤을 새는 하나의 도박장이었던 것. 그러다가 전국에 새마을운동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면서 새로운 영농법이 개발 및 보급됐다. 그로인해 농한기 부업이 대대적 붐을 이룬 외에 주택개량 등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주로 바쁜 농사철을 피하여 겨울에 성행하게 되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원예,화훼,특용작물 재배로 농한기가 따로 없는 요즘과는 달리 1970년대 이전에는 새끼꼬기와 가마니짜기로 부수입을 올렸다. 벼와 쌀을 담는 데에는 가마니가 필수적이었고 그러다보니 가마니를 짜는 기계가 대량으로 보급됐다.

가마니를 짜는 법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가마니'란 말 자체가 일본어이다. 가마니틀은 틀과 바디 그리고 대침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새끼줄을 틀에 걸고 대침에 의해 들어간 볏짚을 바디로 눌러 치게 되며 한 사람은 바디질을 또 한 사람은 대침으로 볏짚을 밀어 넣는다. 능숙한 사람은 하루에 서너 장의가마니를 짜는데 보통은 잡담과 노래,막걸리 추렴으로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하루 두 장 정도의 가마니를 짤 수 있다. 예로부터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송평리는 가마니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마을로 유명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모두 사랑방에 모여 앉아 가마니를 짜는 일로 영일이 없었다. 가마니를 많이 짜는 집은 한 겨울에 1백여 장을 짜내는데 대개 스스로 필요한 가마니는 본인이 직접 만들어서 사용했던 것. 이렇게 농가의 부업으로도 단단히 한몫 했던 가마니가 사라지게 된 건 새끼줄의 경우와 같이 나이론사로 만든 부대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부터이다.

가마니는 볏짚으로 만들기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가고 간수에도 문제점이 많았다. 그러나 나이론부대는 가벼운 데다 잘 썩지 않아 간수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가마니의 경우 많은 양의 곡식을 담지 못하거니와 2~3년이 경과하면 볏짚이 썩어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가마니를 짜는 공력에 비해 일만 힘들고 부업소득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해 종당에는 농민들로부터 완전히 외면 당하고 말았다.

10여년 전만 해도 농촌에서는 벼뿐만 아니라 쌀 까지도 가마니에 담아 운반하고 저장했으나 이제는 추곡수매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가마니를 볼 수 없다. 더구나 정미소에서 빻아진 쌀은 1백% 나이론부대에 담겨진다. 가마니가 사라진 이유에는 가마니를 짜는 원자재인 볏짚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한 데에도 기인한다. 볏짚이 길어야 가마니를 짤 수 있는데 통일벼는 키가 작아서 도저히 가마니를 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쌀이 남아 돌면서 통일벼의 재배도 완전히 끝나고 FTA 등으로 쌀시장마저 개방하게 돼 더더욱 가마니는 까마득 잊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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