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송 전 김포문화원 원장

덕포진 발굴에 바친 한 평생 아직도 부족해

"살아생전에 김포 덕포진(德浦鎭·사적 제292호) 본진에 대한 발굴·복원이 이뤄진 것을 보고 눈감는 게 마지막 남은 소원입니다."


김기송 전 김포문화원장(83·김포 대곶면 신안2리)은 "덕포진은 군사용어로 설명하면 전쟁하는 전방 진지, 즉 OP"라며 "덕포마을에 본진지가 있는데 포탄저장고(화약고) 등을 발견했지만, 현재 복원이 사실상 중단된 상황"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현재 마을에 있던 화약고 건물도 사라지고, 사유지인 우물지 등에 대한 재산권 행사가 묶이거나 막대한 발굴비용 탓에 복원은 정지된 상태다. 김 전 원장은 "통진읍지에 보면, 본진의 건물 규모와 배의 숫자 등이 나와 있는 상황인데 복원은 더딘 상태"라며 "귀중한 문화재가 더 훼손되기 전에 조속한 시일 내에 복원할 것"을 정부 당국에 주문했다.

덕포진 발굴 초창기, 2.4㎞에 달하는 진입로를 개설하는 등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덕포진’을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 전 원장. “덕포진 복원을 위해 평생을 바친 헌신, 그리고 막대한 비용을 조달키 위해 내놓은 사재만 해도 어마어마하다”는 게 그를 아는 동네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리다.


이 같은 결과가 있기까지 세간에 떠도는 그를 둘러싼 갖은 억측과 지적들에 대해 김 전 원장은 한마디로 '허튼소리'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돈을 벌려고 했다면 이 일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겁니다"라며 목청을 높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현재 김 전 원장 슬하의 2남3녀는 덕포진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 그 흔한 재단 하나 만들지 않았다. 박물관이나 기념관 등을 사재로 만든 뒤 공공기관에 기부, 종신직 관장을 하는 등 물러나지 않으려는 잘못된 세태와는 사뭇 다른 그의 행보가 폐부에 와닿았다.


모든 공과를 뒤로한 채 덕포진을 둘러보던 김 전 원장은 "덕포진이, 아니 역사적으로 김포가 수도 서울을 지키는 길목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호소했다. 수도 서울의 길목을 지키는 목 진지인 토성 '덕포진'은 병인·신미양요 때 외세의 공격을 막아낸 가장 중요한 역사현장이기 때문이다.


김 전 원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심이 없는 '진실'로 느껴졌다. 그는 평생 거짓말 안 하는 것을 '철칙'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했다. 김 전 원장은 "부산서 3년간 군 복무를 할 당시 숫자를 늘리고 줄이는 거짓말에 환멸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 때문인지 김 전 원장은 일찍부터 기록에 남달랐다. 일기장에 자신의 삶을 가감 없이 써 온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사관이 쓴 '사초 일기'나 다름이 없다.


1961년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진 김 전 원장의 일기장에는 손돌묘 복원에 이어 덕포진 발굴 및 복원 등 전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손돌공 진혼제(1970년 4월 6일)를 드린 날, 경기도의 한 공무원에게 들은 ‘덕포진이 여기에 있다’는 말 한마디에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바뀌고 말았다.


꿈에서까지 덕포진을 찾아다녔다는 초기 3개월 동안을 술회하던 김 전 원장은 "손돌공이 꿈에 나타나 덕포진이 있는 곳을 알려줬다"고 말하며 빙그레 웃는다. "마을 사람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잊혀진 덕포진의 포대가 있을 법한 곳에서 서광이 비치는 꿈을 꿨다. 1970년 9월 30일 벼를 베기 위해 산 일꾼 10여 명을 투입, 4~5m를 파고 들어가니 포대가 나와서 발굴하게 됐다"고 전한다.


그러나 덕포진의 발굴은 김포의 한 촌부가 진행하기엔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다. 덕포진을 발견한 이후 문화재청과 경찰서 등에서 경비를 세워 김 전 원장의 사적 접근을 통제했다. 마음대로 접근했다간 도굴범이 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문화재청 전문위원 외에는 아무도 삽질을 못 하게 하면서 발굴은 지지부진해졌다.

그가 포대를 처음 발굴한 지 10년이 지난 1980년 5월, 대대적인 발굴 결과 포대 15개소, 화포 6문이 출토됐고 각 포대에 공급하는 불씨를 보관하던 파수청 등 덕포진 일원이 복원됐다. 한강과 염화강 등에 의해 서해로 쓸려갔던, 강화해협에 묻혔던 ‘덕포진’이 역사물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김 전 원장이 다음 세대에 반드시 남겨주고 싶은 보물은 바로 ‘덕포진’. 세계의 각 나라가 조상들이 남겨준 문화유산으로 먹고 산다고 역설하는 그는 “역사문화도시인 김포에는 세계문화유산 장릉과 문수산성, 덕포진 등 국가사적이 많이 있는 만큼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 잘 발굴·복원하면 후세에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 전 원장은 사회공헌 활동가였다. 그는 1963년 7월 김포 대명초 맞은 편에 중학교 과정의 ‘신명학당’을 세우고, 선생님과 100여 명의 학생을 모아 가르치다 3년 만에 문을 닫기도 했다. 또 1970년대 새마을운동 이전엔 재건운동을 벌였다. 새마을 지도자로 마을복원사업을 펼치던 김 전 원장은 마을문고 등 6개 단체 3천여 명을 담당하는 새마을회 김포지회장을 역임하며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포시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여전하다. 그는 "다리 10여 개를 통해 고양과 서울·인천 등지에서 김포로 오가는 만큼 김포시는 인공섬이 됐다"며 "검단신도시 등을 김포로 편입해 온전하게 하나의 섬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속한 시일 내에 김포 섬을 온전하게 하나의 섬으로 만들기 위한 행정체제개편을 단행할 때만이 김포시의 미래가 열릴 것"이라며 통일시대의 김포를 꿈꾸기도 했다.


김 전 원장은 젊은 세대에게 "본인이 나아갈 길, 즉 목표를 세워서 부모 재산 등에 기대지 말고 부모나 형제에 부담을 주지 않고, 나 스스로 개척해서 지역의 작은 일꾼이 되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참으로 어려운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늙었다 한숨 쉬지 말고, 일찍 일어나 비닐봉지 하나 들고 담배꽁초라도 주워담는 게 스스로 운동하는 거고, 지역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다"며 "젊은 사람들의 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동참을 촉구하기도 했다.         

■김기송 전 원장은?

▲ 1933년 수원 출생(83세)
▲ 서울 마포고 중퇴
▲ 1970~1990년 덕포진 발굴 및 복원추진위원장
▲ 1984~1988년 김포군 새마을지회장
▲ 1991~1995년 김포시 4·5대 문화원장
▲ 2002~2010년 김포시 노인대학 총동문회장

                                           
전상천 경인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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