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김포 코리아” 희망을 노래하는 카나리아



모두가 다정한 형제처럼
우리의 가슴이 열리는 곳
오오 김포 코리아~

저 멀리 한 여인이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는다. 커다랗고 까만 선글라스를 머리에 꽂은 멋쟁이 여인. 기자가 긴가민가해 휴대폰을 걸었더니 마침 그 여인이 전화를 받는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유투브를 실행시키는 이금옥 씨. 이 씨의 휴대폰에서 신나는 리듬과 함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들어보니 김연자의 노래다. 한 소절을 듣더니 이 씨가 가볍게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김연자의 목소리와 거의 흡사한 이 씨의 음성. 그야말로 나만의 음악회가 시작된다. 지난 17일 걸포중앙공원에서 열린 2015김포세계인큰잔치 행사중 외국인주민장기자랑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금옥 씨(54)를 만났다.

-장기자랑 1등이 그냥 얻어진 게 아닌 것 같다.

“세계인큰잔치 장기자랑 때 저보다 잘 부른 사람이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청년이었죠. 그런데 노래가락이 너무 슬펐어요. 잔칫날인데. 그래서였던지 제가 1등에 뽑혔지요. 사실 긴장 많이 해서 1등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1등으로 뽑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노래를 부를 땐 완벽한 우리말이어서 몰랐는데 상당히 우리말이 서투르다. 하지만 듣던 대로 조선족 사투리는 아니고 우리말 처음 배우는 서양인이 말투다. 지난 17일 세계인큰잔치 장기자랑에서 대상을 받은 사람이 중국동포라던데. 이상하다. 조선족이 아닌가?

-중국에서는 어디서 살았나? 말씨가 조선족 사투리가 아닌 것 같은데

“텐진에서 나고 자랐지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제시대 때인 1942년 만주로 오셨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텐진으로 옮기셨지요. 거기서 태어났고요.”
일제 강점기 때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수원이 고향인 할아버지가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물 설고 낯 설은 타향에서 갖은 고생을 한 할아버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공부시켰고, 아버지는 텐진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텐진에는 한국사람이 별로 없어요. 초중고등학교를 다 중국학교에서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숙사에 들어갔어요. 일찍 집을 떠나 살았기에 한국말을 배우지 못했어요.”
대학에서 국제무역을 전공한 이금옥 씨.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곧 결혼을 했다.
“남편은 중국사람입니다. 딸 하나 두었고요. 지금 24살입니다.”
일 하는 재미에 푹 빠져 결혼하고도 5년이나 애를 갖지 않았다는 이 씨. 휴대폰에 저장된 딸 사진을 보여준다. 이 씨를 닮아 잘 생긴 처자다.

-한국에 오게 된 이유는?

“88올림픽 때 아버지가 중국에 있는 한국사람들 중 최초로 한국에 나왔어요. 그러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수교하면서 텐진시가 서울에 대표부를 만들었는데 그 때 아버지가 대표부 직원으로 서울에 왔습니다. 서울에서 근무하시다가 은퇴하면서 한국에 눌러 앉게 되신 거지요. 몇 번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왔는데 좋았어요. 그러다 하나뿐인 오빠도 서울에 나오게 됐고 이번에 저도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한국에 오니 무엇이 좋던가요?

“일단 공기가 다르더라고요. 텐진은 공기가 안좋아요. 여기 있다가 들어가면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지요. 그리고 중국은 음식 안전 문제가 심한데 여기는 그렇지 않고요.”
-중국에 한류가 유명한데 한국사람이라 자부심도 많았겠다
“젊은이들에게는 정말 한류열풍이 굉장해 뿌듯하지요. 하지만 중국에서 한국사람은 인기가 없어 주위에 한국사람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특히 연변 사람들은 중국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닙니다. 중국말도 잘 못하고 중국 법도 잘 안지키고 해서 중국 현지에서는 연변 조선족은 인기가 없어요.”한국에 온 지 1년 6개월 된 이금옥 씨. 이 씨의 하루는 바쁘다.
“일단 한국말을 배우는 게 급했어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여성회관에서 한국말 강좌를 들어요. 여기 오기 전에는 한국말 하나도 못했는데. 지금은 잘 하지요? 하지만 한국말은 쓸 때 받침이 너무 어려워요.”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하는 이 씨. 귀화시험에도 합격해 곧 주민등록증도 나온단다.

-장기자랑에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어렸을 때 합창단도 하고 중국에서 살 때 노래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주위에서 잘 한다고도 했고요. 여성회관 한국어강좌가 쉬는 겨울방학 때 인천에 있는 합창단에 들어가서 노래 열심히 불렀어요. 말 배우는 데는 노래부르는 것처럼 좋은 게 없거든요.”
다문화센터 김연화 센터장의 도움으로 주부합창단 단원으로 노래를 부르던 이 씨. 세계인큰잔치에서 장기자랑이 열린다는 김연화 센터장이 알려주고 나가기를 강권했다.
“예심이 5월 3일인데 이틀 전에 나가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고민하다가 나가기로 결정했는데 가사 외우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시간이 없어 연습도 별로 못하고.”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하며 배운 영어. 무역업에 종사하며 영어를 원어민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 이 씨.  대회 예심에 부를 노래로 평소 즐겨 부르던 클레오의  ‘You are always in my heart'를 선택했는데 주최 측으로부터 영어 노래는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부랴부랴 한국 노래를 고르려했지만 눈에 띄는 곡이 없었다.
“이번 대회에서 최우수상 받은 것은 모두 다문화센터장 선생님들 덕이지요. 노래도 골라주시고. 가사도 적어주시고요.”
이 씨가 그토록 고마워하는 다문화센터 선생님. 선생님들은 이 씨의 연습을 위해 노래방을 같이 전전해 주었다.
“노래방에서 연습하는데 점수가 잘 안나왔어요. 95점. 아무리 연습해도 그 이상은 점수가 안나와 속상했어요.”
시민회관에서 열린 예심에 당당히 합격한 이금옥 씨. 하지만 대회 당일 노래로 출전한 사람은 6명, 나머지는 춤을 비롯해 다양한 장기를 가진 사람들이 출전했다.
“상금이 50만원이나 됐어요. 다문화센터 선생님들께 한턱 쐈지요.”
아버지가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고 계셔 더욱 떨렸다는 이금옥 씨. 1등 수상할 때의 감격이 아직 떠나지 않는지 얼굴이 홍조를 띤다.
“귀화가 결정되고 한국말이 더욱 익숙해지면 여행사를 차리고 싶어요. 중국사람들이 한국에 여행올 때, 한국사람이 중국에 여행갈 때 제가 인솔해서 여행하고 싶습니다. 그게 꿈입니다.”

하고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계획을 이야기 하는 이금옥 씨. 눈가에 주름이 지는 나이가 됐지만 꿈을 꾸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다.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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