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곶면은 삼국시대에는 분진현(汾津縣), 고려때는 통진현(通津縣), 조선초 통진현으로 있었다. 영조 36년(1760)에 각 고을의 읍지를 모아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의 통진부 방리(方里)에 따르면 월곶면 지역에는 부내면(府內面)과 보구곶면(甫口串面)과 월여곶면(月余串面), 겁을전면(迲乙田面)이 있었다. 다만 이들 면이 모두 현재의 월곶면이 된 것은 아니고 후대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4개 면지역의 전부 또는 일부를 합병해 월여곶면의 월(月)과 보구곶면의 곶(串)을 합성해 월곶면으로 명명했다. 1983년 1월 10일 대통령령 제11107호에 의해 통진면이 신설됨에 따라 2월 11일 월곶면 소속이었던 옹정리, 고정리, 서암리, 귀전리, 동을산리를 통진면으로 이관했다. 1991년 이전에는 옛 통진군 감영(監營)을 면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91년에 현 위치에 건축했다.
22개리 중 7개리가 대북 접적지역으로 휴전선과 8km지점에 위치하며, 해안선이 16km에 이르는 안보의 요충지다.
문수산을 중심으로 한 등산로와 산림욕장, 조각공원, 눈썰매장, 청소년수련관 등이 자리하고 있어 관광지의 여건을 가지고 있다. 2015년 3월 현재 면적 51.91㎢, 세대수 2,857, 인구수 5,586명이다.

월곶면의 인물

▶ 민기(閔箕, 1504년~1568)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경열(景說), 호는 관물재(觀物齋)·호학재(好學齋)다, 본관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양천현령(陽川縣令) 세류(世瑠)의 아들이고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31년(중종 2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이듬해 홍문관저작이 되고 군기시첨정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해며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가 상주에서의 가혹한 군포징수를 상주하여 시정케 했다.
명종 19년 부제학, 이조·예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 1566년 형조·이조판서, 다음해 지중추부사, 추참찬, 선조 1년(1568)에 우의정에 올랐다. 학자로 이름이 높았고 문장에 능했다. 시호는 문경(文景), 묘는 월곶면 개곡리에 있다.
▶ 임용우(林容雨, 1984~1919)
월곶면 개곡리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9일 최복석, 윤영규 등과 함께 월곶면 길산리, 조강리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시위운동을 주동했다. 외딴섬인 부천군 덕적면 진리에 은거해 사립 명덕학교(明德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서 2세 교육와 주민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일에 주력했다. 1919년 2월 천도교 측의 연락을 받고 상경해 3월1일 서울에서 전개된 3.1운동 독립선언식에 참가했다. 3월29일 정오경 월곶면 갈산리에 시위 군중을 집결시켜 최복석이 만든 태극기를 앞에 내세우고 독립만세행진을 벌이고 오후 2시경 군하리 향교와 공립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4월 9일에는 명덕학교 운동회를 덕적도 해안가에서 개최하여 면민과 학생 전원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이들 앞으로 나아가 이재관·차경창 등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인천경찰서에 구금됐다가 5월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협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못 이겨 옥중에서 순국했다. 1947년3월1일 덕적도민과 문인 및 제자들이 위국충의를 기념하기 위해 덕적도 중앙에 충절비를 세웠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월곶면의 문화유산

▶ 문수산성(사적 제139호)
문수산(376m)에 소재한 문수산성은 조선19대 숙종20년(1694)에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외적 방비와 강화도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이다. 축성 당시 북분, 서문, 남문이 있었으나 병인양요 때 북문, 서문, 남문이 병화로 소실됐다, 1993년 북문 복원을 시작으로 지난 20년 동안 북문, 남문, 총 655m 구간의 성곽 보수가 진행됐다. 최근에는 장대지부터 아래로 200m 구간의 성곽공사를 완료했다. 이번달부터는 남문이 해체보수공사에 들어가 연말쯤 완료될 계획이다.
▶ 문수사 풍담대사부도 및 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1호)
풍담대사(楓潭大師)는 신라 공혜왕 때의 인물로, 전국을 돌며 불교를 전파하던 중 문수사 불도들의 생활상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머물며 불교를 전파해 절이 번창하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풍담대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문수사 부근에 비가 세워졌고, 그 옆에 부도까지 조성됐다.


◆ 월곶면의 전설

▶ 용허리길 전설
‘용허리길’은 월곶면 군하3리 봉골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옛날 이곳에 부모와 외아들이 살았는데 부자면서 인심이 후해 항상 많은 손님이 드나들었다. 아들이 결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는 세상을 떠났으나 부모 생전과 마찬가지로 객들의 왕래는 여전히 빈번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며느리는 객들의 빈번한 왕래를 반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찾아온 시주승에게 후하게 시주를 하고 묘안을 구하자 시주승은 “밤중에 머리를 빗고 마을 뒷산에 길을 만들면 방문객이 없어질 것”이라고 묘책을 알려주었다.
며느리는 어느 날, 하인들을 시켜 밤중에 뒷산 허리에 길을 만들도록 하고 자신은 머리를 감고 빗질을 시작하자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이 집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하인들이 산을 잘라 길을 만들자 그곳에서 하얀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용의 허리를 잘라서 피가 나온 것이라 수근댔다. 그때부터 그 길을 '용허리길'이라 불렀으며, 또한 밤중에 여자가 머리를 빗으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여 밤중에 머리를 빗는 것이 금기(禁忌)로 전해오고 있다.
권태일 김포문화원 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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