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갈이는 행복한 주방을 돌려주는 사람

이 칼로 이 업소 대박나게 해 달라 칼 갈면서 기도해
숫돌로 정교하게 칼 가는 실력 전국에서 최고 자부심

0.5톤 장난감 같은 작은 트럭. 겉면에는 칼과 가위를 갈아준다는 문구와 함께 대장장이라는 상호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트럭 짐칸에는 각종 칼과 칼을 가는 숫돌이 매달려 있는 기계 한 대가 전부. 머리가 하얗게 센 아저씨가 마스크를 쓴 채 칼 가는 데 열중하고 있다.
요즘 보기 힘든 칼가는 장면에 순간 직업정신이 뛰쳐나온다. 트럭 옆에 선 채 칼 가는 모습을 정신없이 지켜보았다. 옆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는 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칼가는 연마기에 식칼을 두 손으로 누르고 밀고 당기며 칼 가는 데 열중하고 있는 칼갈이 장인. 잠시 후 손가락 끝으로 칼날을 살피며 갈려진 상태를 보던 장인은 갑자기 머리에 칼을 갖다 댄다. 톡톡 끊겨 나가는 머리칼. 흡족한 표정이 장인의 얼굴에 스친다.
한데 참 묘한 생각이 든다. 한참만에야 마스크를 벗고 기자를 향해 얼굴을 돌린 장인의 모습이 너무도 잘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잘생긴 얼굴과 칼가는 것과는 다르지만 좀 허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 양복에 넥타이를 매면 바로 전문가 포스가 날 만한 신사의 얼굴이다. 박경목 ‘대장장이’ 대표와 길거리 즉석 인터뷰를 시작했다.

칼갈이는 버려진 칼에 새 생명 불어넣는 일

-집에서 칼을 갈 땐 잘 안되더라. 어떻게 칼을 갈아야 잘 갈 수 있나
“칼은 양날 칼이 있고 오른손잡이를 위한 오른쪽 날이 있는 칼, 왼손잡이용 왼쪽 날 칼이 있습니다. 보통 쓰는 식칼은 오른손잡이용이라 칼날 오른쪽에 각이 있지요. 왜냐하면 칼로 식자재를 썰 때 오른쪽에 각이 있어야 식자재가 오른쪽으로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고기나 배추 등 두꺼운 재료를 썰 때는 양날에 칼날이 서 있는 칼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똑바로 썰어지기 때문이죠. 이런 칼의 기초적 특성을 알고 칼을 갈아야 합니다. 먼저 숫돌 위에 칼을 올려놓으면 칼날 부분이 살짝 들립니다. 들린 만큼 칼날을 숫돌에 눌러 밀착시키고 각이 서 있는 오른쪽 70%, 반대쪽 30%의 비율로 갈면 잘 갈려진 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칼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막힘없이 칼의 구조부터 칼가는 방법을 얘기한다. 말 소리도 조근조근하니 선생님이 따로 없다. 아내가 어쩌다 한번 칼을 갈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내딴에는 열심히 갈아주어도 칭찬 한 번 듣지 못했던 일이 생각난다. 아, 그냥 엉터리로 갈았구나. 무딘 칼이 무섭다고 아내는 칼을 쓰다 손가락을 다치는 때도 많다.
“잡생각을 하면 다칩니다. 칼을 갈다 손가락을 크게 다친 적도 있습니다. 이 숫돌 연마기가 분당 2~3천번 회전을 하는데 잠시 한눈을 팔면 칼이 튀어나오거든요.”

칼갈이는 과학이자 종합예술

요즘 주방에서 많이 쓰는 칼은 예전의 무쇠칼이 아닌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칼. 쓰다보면 이도 빠지고 갈아도 시원찮다. 버릴 데도 마땅치 않아 안쓰는 칼이 주방 싱크대 서랍에 한두 개씩 있을 정도. 칼갈이를 업으로 하는 장인에게 칼갈이는 무슨 작업인지 물어봤다.
“칼갈이는 단순히 무뎌진 칼날을 가는 게 아니라 무너진 칼날 선을 바로잡아주는 사람이예요. 칼을 쓰는 사람을 보면 밀면서 써는 사람이 있고 당기면서 써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는 사람의 칼은 손잡이 쪽이, 당기는 사람은 칼 앞부분이 닳지요. 칼이 안든다고 그 부분만 갈다보면 칼날 선이 무너져 버립니다. 또 습관에 따라 칼을 도마에 탕탕 치면서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칼날 이가 빠지게 됩니다. 이런 칼을 거친 숫돌, 중간 숫돌, 고운 숫돌 3단계를 거쳐 바로잡는 게 이 직업이지요. 고객이 새칼을 잡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작품을 만들어 돌려주는 일이라고 자부합니다.”
칼만 척 봐도 좋은 칼인지 구분하는 박 장인. 일식집의 고급 회칼을 만날 땐 더욱 신중해진다.
“한번 맡겼다가 흡족하게 갈아주면 단골이 되지요. 그러면 새 칼을 구입했을 때 자기 손에 맞게 조절하는 것도 부탁합니다. 처음 구입한 칼은 칼 몸이 넓거든요. 칼 몸이 적당하게 좁아야 일할 때 힘이 덜 들고 오래 사용한 칼처럼 손에 잘 맞기 때문이지요. 그럴러면 새로 칼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술력과 영업력으로 독보적 칼갈이로 우뚝

박경목 장인은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기업의 영업맨 출신. 나이가 들어가며 성과에 대한 스트레스와 현실에서의 한계에 힘들어하던 박 장인은 창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 때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세 가지.
“수요는 많지만 종사하는 사람이 적은 일일 것, 고객이 행복해지고 고마워하는 일일 것, 자본이 적게 들고 현찰을 받을 수 있는 일일 것 등 세 가지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창업아이템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칼을 가는 모습을 보고 바로 이거다 생각했지요.”시골 출신이라 어려서 농사짓는 것을 보고 익힌 박경목 장인이라 칼이나 낫을 가는 일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남에게 돈을 받고 갈 만큼의 실력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죽기살기로 기술 익히기에 나섰다.“다들 공업용 그라인더를 이용해 칼을 갈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전 전통 숫돌로 갈아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그라인더로 칼을 갈면 빨리 갈 수는 있지만 칼이 뜯겨나가 정교하게 갈아지지 않습니다. 가르쳐주는 데도 없고 숫돌로 된 연마기를 파는 곳도 없고. 고생 많이 했지요.”
칼을 사다 일부러 바닥에 내려쳐 이가 빠진 칼을 만들고는 숫돌에 가는 일이 반복됐다.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기술자와 함께 숫돌연마기를 만들어 공업사에 숫돌연마기를 주문제작하고 트럭을 장만했다. 이제는 실전에서 부딪히는 일뿐.
“처음엔 큰 실력을 요구받지 않는 아파트를 다니며 주방용 칼을 갈기 시작했죠. 그러다 실력에 자신이 붙으면서 정육점과 일식당 등 전문적으로 칼을 다루는 곳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전 지금도 점심은 비싼 식당에 가서 먹어요. 먹고 나서 명함을 주고 칼을 한번 갈아보라고 권합니다. 한번 맡긴 사람은 흡족해하고 단골이 되더군요.”
영업맨 출신답게 영업에도 남다른 능력을 보인 박 장인. “지금 실력과 영업으로 내가 전국에서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칼 하나로 제2의 인생을 활짝 연 셈이다.
“제가 갈아 준 칼을 쓰며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이 직업 택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야말로 주방에 편리함을 주고 요리가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지요. 지금은 거래처가 많아 엄두를 못내지만 좀 더 나이가 들면 캠핑카에 칼갈이 장비 싣고 전국을 다니며 놀다가 돈 떨어지면 칼 갈아서 경비 벌며 여행 다니는 게 꿈입니다.”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는 셈. 박 장인의 꿈이 부러운 날이었다.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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