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논설위원/ 세무사/ 경영학박사

2015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저격함으로서 일본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등박문은 한국을 일본에 합병시키는 기초를 닦은 우리민족의 원흉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쯤 이등박문과 불과 10여보 떨어진 지점에서 벨기에제 브라우닝 반자동권총 M1900으로 통렬한 방아쇠를 당겼다. 세 발의 총탄이 각각 원흉의 가슴과 흉부, 그리고 복부에 명중됐고, 이등박문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안 의사는 나머지 4발 중 3발을 발사해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일본총영사, 궁내대신 비서관, 그리고 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장인 다나카 등에게 중상을 입혔고, 마지막 한발은 발사하지 않았다.


  안 의사는 거사를 마친 후 대한민국만세 3창을 하고 태연자약하게 러시아 헌병장교 미치올클로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 자리에서 안 의사는 ‘내 이름은 안응칠, 연령 31세,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 중 적의 괴수를 처단, 응징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일본 영사관에 인계되어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다. 안중근은 제1차 검찰심문(1909.10.30)에서 이등박문을 죽인 이유 15가지를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밝히며 한국 독립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주장했다. 


 안 의사는 옥고를 치는 중에도  ‘國家安危勞心焦思’ 와 ‘爲國獻身軍人本分’을 비롯한 유묵(遺墨) 64여종을 썼다. 여기에는 하나같이 ‘大韓國人安重根’의 短枝掌印이 찍혀있다. 그리고 안중근은 2월 17일 고등재판장 히라이시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동양평화론”을 설파하기도 했다. 재판은 안중근 의사에게 또 다른 의미의 대일 투쟁인 셈이었다.


 이장희 교수는 ‘안중근의 재판은 처음부터 불공정하게 집행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명순구 교수는 재판 관할권이 일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점, 적용되어야 할 법이 일제의 법률 또는 국내형법이 아니라 국제법이라는 점, 안중근은 군인이었으므로 ‘흉한’ 이라고 부를 수 없는 법적 이유가 있다는 점을 들어 재판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 남만주 철도주식회사 이사장이었던 다나카 세지로(田中淸次郞)는 ‘당신이 지금까지 만난 각국의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느냐’는 질문에 ‘분하지만 그 사람은 안중근이다’라고 대답했다. 당시의 일본 상황으로서는 안중근 만큼 미워해야 할 사람도 없을 텐데 말이다. 또한 히라이시 뤼순 고등법원장이나 검사 ^판사 ^ 간수 등 안중근을 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했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은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휘호를 가보로 보관할 정도였다고 한다.


 도대체 안중근 의사는 어떤 인물인가.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의병장이며 정치사상가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 그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 7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응칠(應七)이라 불렀고, 19세 때인 1896년 7월 황해도 안악군 매화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프랑스 외방선교회 빌렘 신부(한국 이름 홍석구)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남달랐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는 안 의사의 사형선고 소식에 짧고 단호한 편지를 썼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나오거라’


  김수환 추기경은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안 의사의 의거는 가톨릭 신앙과 상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신앙심과 조국애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일제의 무력 앞에 민족의 존엄과 국권을 지키기 위해 행한 모든 행위는 정당방위와 의거로 보아야한다.”고 평했다. 또한 ‘의사 안중근’(1999)이라는 글을 펴낸 신성국 신부는 안 의사는 순교의 맥이며, 실학을 몸으로 완성한 실학의 맥이며, 해방자로서 ‘한국의 모세’이고 선교열정의 측면에서 ‘한국의 사도바오로’라고 극찬했다.


  안중근 의사로부터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가치는 순교로서 하늘을 공경하고 이민족을 사랑하는(敬天愛人)사상 즉, 신앙인답게 자신의 신념을 목숨을 걸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 정신을 오늘에 사는 젊은 영혼들이 계승발전 시킬 것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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