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씨

                                  정병근

녹슨 쇠 울타리에
말라 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 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속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 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

[프로필]
정병근 : 경북 상주, 동국대 국문과, 제1회 지리산 문학상 수상, 시집[태양의 족보]외 다수

[시감상]
누구에게나 처절했던 기억이 있고, 처절한 시간이 있었고, 삶을 이겨내기 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한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나팔꽃 줄기, 기어간 시간들, 본문 중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이라는 말이 봄을 대하는 나를 반추하게 한다. 봄 한 철 환하게 힐 수 있는 그런 가슴 속 나팔꽃 힘차게 키워 볼 시간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란다.

<글 :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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