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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이야기] 모담산 자락 용화사를 품고 있는 운양동

   
▲ 운양동 주민센터

 

 

 

 

 

 

 

 

 

 

 

예로부터 운양포(雲陽浦)가 있어 운양리로 불러왔다는 설과 운양산 일대에 안긴 마을이라 하여 운양리라 했다는 설이 있는 운양동. 운양동 지역은 정조 13년(1789)의 <호구총수>에 김포군 석한면(石閑面)의 방리(坊里:면·리)로 천현리(泉峴里), 청수동리(靑水洞里), 운양리(雲陽里), 장기리(場基里), 운유하리(雲遊下里), 고창리(高昌里)의 6개 리(里)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어 처음 문헌에 등장한다.
헌종 8년(1842)의 <김포군읍지>에도 그대로 6개 리가 설치되었고, 고종 8년(1871)의 <김포군읍지>에는 발산리(鉢山里)가 추가 설치되어 7개 리가 되었고, 광무 3년(1899)의 <김포읍지>에서는 다시 발산리가 삭제되고 예전의 6개 리만 존치된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조정할 때 그 이전 석한면의 법정리였던 천현, 청수, 운양, 발산의 4개 리를 법정 운양리(雲陽里)로 포괄하고 확대개편 된 김포군 군내면에, 1939년에는 김포면에 소속시켰다. 1979년 이후에는 김포읍으로 소속됐다.
행정리는 1리 천현(泉峴), 2리 청수(淸水), 3리 재촌(齋村), 4리 대촌(大村), 5리 발산(鉢山)으로 구분하여 왔으나 1992년부터 1리 천현에서 '한옥'이 분리되어 6리가 되었다. 1998년 김포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포1,2,3동으로 분동되면서 김포2동에 소속되며 운양동이 됐다. 올 2월2일에는 김포2동에서 분동돼 운양동 주민센터를 개청했다. 2015년 2월 2일 현재 면적 7.13㎢에 행정구역은 23개통 181개반이다.
천현(泉峴) : 천현마을 뒷산인 모담산 중턱에서 샘물이 흘러 천현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모담산에는 새나뭇골에 유명한 약수터가 있고 마을 앞에도 샘재연못이란 샘이 있다.
청수(淸水) : 예로부터 마을이 청석(靑石)으로 되어 있어 청석에서 솟는 물이 맑다 하여 청수라 했다.
재촌(齋村) : 마을 내에 재궁(齋宮)이 있어 재촌이라 했다는 설과 조선조 어느 후궁의 아들 즉 어느 군(君)이 이 마을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재촌이라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대촌(大村) : 예전에는 운양리에 두 개 마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큰 마을을 대촌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고유 명칭은 '큰말'이다.
발산(鉢山) : 옛적에는 '바위배기'라 불러왔는데 대촌에 용화사가 창건된 후부터 그 절에서 들려오는 효종성(曉鐘聲:새벽종소리)를 듣고 '발산'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 심응사당

 

 

 

 

 

 

운양동의 대표 인물 양호공 심응(沈膺 1433~1504)
양호공 심응은 조선시대 무신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태종(太宗) 좌명공신 풍산군 정양공 구령(龜齡)의 손자로 상주목사(尙州牧師) 치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대장부로 태어나 고루하게 붓대나 잡고 시가(詩歌)나 읊으면서 세월을 보내겠냐며 글방을 박차고 나와 무예(武藝)를 익히기 시작하였는데 천품(天稟)이 남아의 기개와 무인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한다.
단종 1년(1453) 음보로 충의위(忠義衛)에 배속되었다. 세조 5년(145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웅용지사(雄勇之士)의 칭호를 받고 왕실금위(王室禁衛)로 발탁되었으며, 세조 11년(1465) 내금위(內禁衛) 무예장에서 활로 철전(鐵箭:쇠로 만든 화살)을 300보 지점 밖에서 적중시켜 금위군에서 제일로 꼽혔다.
세조 13년(1467) 길주(吉州:함경북도)의 호족 이시애(李施愛)가 지방 세력을 배경으로 북도인(北道人)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민심이 혼란할 때 조석문(曺錫文), 어유소(漁有沼) 허종(許琮)과 함께 반군을 토벌하여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의 서훈을 받아 절충장군에 승서되었다. 성종 6년(1475) 첨지충주부사에 제수된 후 성종 9년에는 행회령도호부사(行會寧都護府使)로 명을 받아 근무 중 성종 14년 가선대부(嘉善大夫) 풍산군(豊山君)에 봉호를 받았으며, 이어서 성종 15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도 종신토록 녹봉을 받을 수 있도록 은전을 받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성종 22년(1491) 북쪽의 호병(胡兵)이 출몰하여 변장(邊將)을 살해하고 소요할 때 야인들을 정벌하라는 왕의 교서를 받고 두 아들을 대동하고 출정하여 적의 소굴을 소탕하는 공을 세웠다.
연산군 10년(1504) 졸(卒)하여 부음이 조정에 계달되자 왕이 유사(有司)를 보내 조문하고 예장케 하였으며, 양호(襄胡)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왕이 쓴 철권단서(鐵券丹書:목판에 철권이라 쓴 공훈록)와 초상화를 내렸다. 후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묘·신도비·사당(향토유적 제4호)이 운양동 모담산에 있다.

   
▲ 용화사

 

 

 

 

 

 

운양동의 대표 문화유산
심응 사당-김포시 향토유적 제4호(1986.3.3. 지정)로 운양동 314-2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 심응(沈膺 1433∼1504)을 제향하는 사우(祠宇: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로 조선 말기에 건립되었다. 정면 3.9m, 측면 3.3m 규모의 목조건물로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거의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묘와 신도비는 사당의 동쪽에 있는 뒷산 북쪽 기슭에 조성돼 있다.
용화사 미륵석불-김포시 향토유적 제7호(2004.8.21. 지정)로 금포로 1487-5(운양동)에 위치한 용화사에 보관돼 있다. 용화사는 운양산(雲陽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암이다. 용화사 미륵석불은 용화사의 창건설화에 나오는 석불로 조선 초기 불상양식을 지니고 있다.

   
▲ 용화사 미륵
운양동의 전설
1405년(태종 5) 어느 날 정도명이라는 사람이 강화도에서 세금으로 징수한 곡물을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운반하던 중이었다. 옛날에는 강화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은 한강을 이용한 수로가 중요 운송통로로 이용됐다. 그렇게 정도명이 지휘하던 세곡선이 그날따라 배 밑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무거웠다. 결국 날이 저물어 운양산 부근에 배를 정박하고 늦게 잠든 정도명의 꿈 속에서 돌부처가 나타나 "나는 당신 배 밑에 있는 돌부처인데 나를 좀 건져 올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잠에서 깬 정도명은 주위를 불러 배 밑을 살펴보게 했다. 그랬더니 실제로 불상이 있어 건져 올렸다. 정도명은 이 불상을 발견한 강 뒷쪽에 있는 운양산에 용화사를 창건하고 삭발수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권태일 시민기자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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