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나무 위에서 춤추고 나무는 나를 다듬고


남에게 보여줘야 하는 강박감과 오만함...시간이 가면서 욕심 내려놓게 돼
서각은 인내의 길...나무 위에서 칼이 춤출 때 평면의 글씨가 입체미로 나타나

전국에 10명도 채 안된다는 예술분야에서의 공식 명인. 김포에서는 그야말로 유일한 존재라는 명인 타이틀을 거머쥔 서각의 장인 정민영 명인을 만나러 가는 날. 그 날은 밤새 첫눈이 왔다고 뉴스에서 호들갑을 떨던 날이었다. 옷깃 속을 파고드는 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날 정 명인이 운영하는 전통각자공방 놀구름터에서 만난 서각의 명인은 앉자마자 따뜻한 차를 권한다. 

차를 좋아하다 다도사범 자격증까지 딴 팔방미인

정 명인이 따라주는 차 한 잔을 음미한다. 코 끝에 와 닿는 꽃향기가 그윽하다.
“백목련 꽃봉오리를 따다 말려서 덖은 차예요. 신이화차라고 하지요. 매울 신 오랑캐 이. 매운 오랑캐꽃 차이지요. 차를 만들고 마시다보면 마음도 단련되고 건강에도 좋지요.”
학창시절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현대판화에 몰두하던 정 명인은 현대화를 그릴 때 물감을 개기 위해 사용하는 석유용제의 냄새를 괴로워했다. 서각의 매력에 빠져 나무와 씨름하며 명인은 다도의 세계에도 빠져 들었다.
“제가 원래 음주가무에도 소질이 없어 마땅한 취미가 없어요. 그런데 요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땀한땀 장인의 손길이라는 말처럼 서각 역시 한칼한칼 인내와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죠. 이렇게 작업할 때 청량한 차 한 잔 마시면 정말 좋지요. 차를 좋아하게 되다보니 제가 차도 만들고 다도 사범 자격증도 따게 됐지요.”

전통각자와 자필자각, 캘리그라프(손글씨)까지

정민영 작가는 전통각자 조형화 부문의 명인이다. 전통각자란 무엇인가 물어보았다.
“우리나라에는 아름답고 멋진 글씨가 새겨진 현판과 주렴들이 많이 있었죠. 그런데 오랜 세월 변란과 풍파 속에 많이 소실됐어요. 옛 선조들의 문집에 탁본과 글씨만이 실려 내려오고 있는 것이 많지요. 그 글씨를 서각으로 복원하는 것이죠.”
정 작가는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전통판화 형식으로 조형화 해 제1회 전통판화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정 명인은 한문은 물론 한글의 조형미도 일찍부터 천착해 자필자각, 작가 스스로 쓴 글씨를 서각으로 옮기는 작업도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선조들의 글씨를 복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각에도 창의성과 실험정신이 필요하지요. 제가 좋아하는 글귀나 싯귀, 명언 등을 직접 쓴 다음 각자를 하면 더 애착이 갑니다. 서각은 평면의 글씨에 입체미를 덧붙이는 예술입니다. 캘리그래프처럼 창작한 글씨에 서각을 더하면 훌륭한 작품이 되지요.”

나무 욕심 버리니 나무가 나를 다듬는 것 같아

여리고 가냘퍼 보이는 정 명인. 칼과 망치를 들고 예술을 하기에는 힘이 부치지 않을까 의문이 들었다.
“서각은 인내의 예술이지요. 작품 하나 끝내려면 한 달 이상을 붙들고 있어야 해요. 몰입하다보면 즐거워져요. 작업하는 시간은 나를 잊을 수 있어요. 나무도 무른 나무를 쓰면 제 성에 안 차요. 활엽수가 딱딱한데 그 중에서도 느티나무가 결이 좋아 즐겨 사용하지요.”
“어느 날 산에 갔는데 나무들이 나를 피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그동안 좋은 나무를 갖고 싶어하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나무들이 저를 피하는 것처럼 느꼈나봐요. 그 후 욕심을 내려놓게 됐어요. 전에는 내가 나무를 다듬어서 작품을 했는데 욕심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나무가 나를 다듬고 있더라고요.”
서각하는 기술에서나 정신에서 고수의 느낌을 발하는 정 명인의 말이다.

천천히 가도 멈추지 않으면 도달한다

“간혹 가다가 주위에서 젊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사는데 당신은 하루종일 작업하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분들이 있어요. 저는 서각 작업하는 것이 너무 좋아요.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글씨를 쓰고 새기는 과정과정이 너무 소중하지요. 오히려 젊어서 서각을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왜냐고요? 오래할 수 있으니까요.”
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때 김포로 와 김포초등학교를 졸업한 정 명인. 피광성 의원과 이기형 씨 등이 동기동창이란다.
주부이기에 가정과 아이들 육아에 소홀하지 않으려고 오전에는 집안일을 처리하고 오후에 공방에 나와 서각을 한다는 정 명인. 일과 가정을 양립하려면 힘드시겠다는 질문에 “서각은 몰입의 작업이라 서각하는 동안은 딴 생각 하나도 안 들지요. 힘든 일 괴로운 일, 즐거운 일 모두 잊을 수 있지요.”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명인의 호칭을 받은 정민영 작가. 정 작가가 말처럼 멈추지 않고 오래오래 하다보면 도달하게 될 정 작가의 경지는 어디까지일까 상상해 본다.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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