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산사람의 집)의 발복은 집을 마련하고 난 후 빠른 시기에 나타나며 대체적으로 발복량은 크지 않다. 그러나 음택(묘지)의 발복은 시기가 대체적으로 본인의 당대가 아닌 후손대에 나타나며 발복량이 매우 크게 나타나는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생활문화에서 가장 민감한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조상의 묘지문제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묘지송사를 비롯하여 조상의 묘지문제는 일반 서민에게 있어서도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묘지로 인해 가문이 결속하기도 했고 때로는 가까운 혈족간에 남보다 못한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였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지는 묘지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화의 한 장르로써 복식, 음악, 건축,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예술성이 망라 된 문화였음은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최근 화장문화(火葬文化)가 늘어나고 정부의 규제로 인해 묘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힘든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유교적 사고가 깊거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묘지문제는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음택풍수의 발복문제는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이다. 풍수의 발복과 관련하여 미신이라는 사람도 있고 발복을 증명할 수 있느냐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풍수학을 공부하는 필자의 경험으로 지금도 풀지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발복문제이다. 아마도 결론은 필자보다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게 옳을 것 같다. 필자의 경험으로 양택(산사람의 집)의 발복은 집을 마련하고 난후 빠른 시기에 나타나며 대체적으로 발복량은 크지 않다. 그러나 음택(묘지)의 발복은 시기가 대체적으로 본인의 당대가 아닌 후손대에 나타나 긴 시간을 필요로 하되 발복량은 매우 크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간혹 음·양택 모두 당대(當代;본인대)에 나타나는 경우를 풍수에서는 '당대발복지지(當代發福之地)'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면 좋지 않는 자리에 터(음·양택)를 잡을 경우 살(殺)을 받는다. 풍수에서의 살이란 개념은 재산이 유실되고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경우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따라서 발복은 흉(凶)한 터가 아닌 길(吉)한 터라야 현응적(玄應的)으로 나타난다. 길한 터에서의 발복은 본인 노력의 대가보다 월등히 많은 부(富)를 축적하거나 권위와 명예가 급격히 높아져 신분이 상승하는 경우로 나타난다. 이성적이고 산술적 판단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본인 스스로도 이해가 불가하고 누군가 마치 돕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그러한 상황을 발복이라고 한다. 발복의 과정인 연결매체를 풍수에서는 감응(感應)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조상과 나, 집과 나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응적 현상을 감응(感應)이라고 한다. 이때 음택에서 일어나는 감응을 혈통적인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하고, 땅의 기운이 좋은 양택에 살면서 일어나는 감응을 지기감응(地氣感應)이라고 부른다. 다음은 동기감응에 의한 당대발복의 사례를 소개한다.

십수 년 전의 일이다.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는 모씨(某氏)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상의 묘가 전남 광주에 있는데 묘지감정을 받아보고 싶다고 하였다. 감정 후 흉지(凶地)로 판단되어 이장(移葬)하기로 하였다. 물론 흉지라는 필자의 얘기에 그들은 매우 궁금해 했다. ‘도대체 부모님이 누워계신 묘지의 땅이 어떤 상태여서 나쁘다고 할까?’ 이렇게 말이다. 흉지에 대한 이 같은 생각은 비단 당사자 뿐만 아니라 풍수를 전공으로 하는 대학원생들도 궁금해 하는 사안이다. 2001년 2월 말경 드디어 이장의 날이 되어 있어 묘지 봉분을 열었다. 조상의 유해가 있는 천광(穿壙;사람이 묻힌 구덩이)의 깊이는 1.5m쯤 이었는데 그 안은 차마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지렁이가 득실거리고 알 수 없는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유골은 시커멓게 반쯤 축축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지렁이와 거미는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같은 광경에 가족들은 차마보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거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남은 유골을 추스르고 깨끗이 닦은 후 미리 점지해둔 근처의 길지에 편안히 모셔드렸다. 물론 새롭게 마련된 묘지에 부모님의 유골을 안치하는 전 과정을 형제 둘과 그들의 부인들과 손자들이 지켜보았다. 묘지 봉분이 거의 완성될 무렵 큰 며느리로 보이는 부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보통의 울음이 아닌 가슴속에서 나오는 통곡이었다. 딸도 아닌 며느리의 통곡은 흔치 않기에 필자의 기억으로 또렷이 생각나는 곡소리는 "아버님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어렵게 살다보니… 죄송해요… 이런 상태일줄… 용서해주세요… 아버님…" 뭐 이런 내용의 곡소리를 들으며 제사까지 마쳤다.

풍수음택론에서 음습(陰濕)하고 광중(구덩이)에 음기(陰氣)가 많아 벌레가 발생하거나 뱀과 지렁이, 또는 왕거미나 개구리 등이 침입하는 것을 '충렴(蟲廉)'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장을 하다보면 자주 보게 된다. 이장을 마치고 들어 본 사연인즉, 망인(亡人)의 자손은 형제였고 큰 아들 내외는 안산의 제조공장에서 생산기능공으로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필자에게 묘지감정과 일을 부탁한 사람은 큰아들 내외였다. 그들은 성심(誠心)으로 부모님을 좋은 땅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발복보다도 우선 부모님을 좋은 땅으로 모시고 싶어 했고 동생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당시 동생은 대령에서 연말에 있을 장군진급에 고민하고 있었다. 호남인이라는 이유로 장군진급도 힘들거니와 장군진급을 하지 못하면 부득이 예편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의 일이다. 동생의 장군 진급 소식이 들려왔다. 물론 필자는 위의 사례가 100% 음택에 의한 조상의 동기감응에 의한 발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발복과 관련한 덕담은 한국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이며 필자의 경험에서도 종종 보아왔다. 따라서 '치국평천하'를 꿈꾸는 미래의 목민관(牧民官)들이 갖는 발복의 여망을 굳이 질타만은 할 수 없다. 발복문제를 운운하기 이전에 한 시대를 살았던 선인(先人)들에게 편안한 영면(永眠)을 취하게 하는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후인(後人)들의 도리이고 효의 실천행위가운데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발복은 미신인가? 아니면 증험적으로 나타나는 감응적 현상인가? 이에 대한 답은 필자보다는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 아닐까 싶다.

풍수지리학 자연지리학 박사
한국풍수지리감정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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