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흥궁 답사를 마치며

용흥궁.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하였던 잠저.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붙였다.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임금 철종. 그의 발자취가 어린 곳이 용흥궁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임금 철종. 그의 발자취가 어린 곳이 용흥궁

이번 주부터 김포와 강화도의 관광자원 탐방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용흥궁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흥궁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인터넷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오락과 여가의 대상이 있지만 필자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여가레크리에이션이라고 해봐야 가장 대표적인 것이 TV시청이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대였기에 각 가정에서 시청하는 게 아니라  TV를 보유한 부유한 가정이나 동네 전파상 앞에서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을 보며 고단함을 떨쳐내던 시대였다.  김일의 박치기를 보면서 대리만족과 현실에서의 고달픔을 보상받았으며 홍수환의 복싱경기를 보면서 4전 5기의 정신을 되새겼다. 특히 필자의 어머니는 드라마를 많이 좋아하시고 시청했는데 드라마 ‘여로’는 온 국민을 TV브라운관으로 불러 모았으며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대에는 온 동네거리가 썰렁할 정도였다.

   그러한 드라마 중 어린 시절에 보았던 ‘임금님의 첫 사랑’이라는 드라마가 기억에 남으며 용흥궁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서 임금님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이며, 용흥궁은 철종대왕이 어린 시절 살던 곳을 궁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강화도에 살고 있던 건장한 청년이 어느날 한 나라의 임금이 되어 한양의 궁궐로 들어가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강화도를 떠나는 장면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헤어지는 장면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부러운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이 있었지만, 하나씩 하나씩 퍼즐이 맞춰지고 수수께끼가 풀리는 시간을 맞고 있다.

  철종은 영광의 궁궐로 들어간 게 아니라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린 것이었다. 정조대왕과 순조대왕의 뒤를 이어 보위를 이어받은 헌종이 후사 없이 일찍 승하하자 그 당시 조정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그야말로 이름뿐인 전혀 실권이 없는, 뒤에서 조종하기 편한 후임을 구하다가 강화도에 왕손이지만 몰락한, 원범이라는 청년을 발견하고서 환호한다. 원범은 강화도에서 농사짓고 소 몰던 평민처럼 살고 있던 이름뿐인 왕손인데다 뒤를 받쳐줄 정치세력도 없고, 글도 모르고 오로지 가진 것은 건강한 몸뚱이밖에 없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궁궐에 들어와 몇 년간 수렴청정을 당하고 조정의 일은 안동 김씨 외척들에게 맡겨지고 철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주색뿐이었다.   매일 주색에 중독되니 그렇게 건강했던 몸은 나날이 피폐해지고 결국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조선의 27명의 왕들 중 이렇다 할 업적도 없이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대신들에게 이용당하고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임금 철종. 바로 그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 용흥궁이다.

   사실 필자도 김포대학교로 임용되면서 용흥궁이 철종의 본가라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랐다. 직접 방문해보니 궁이라고 일컫기에 너무 초라한 모습에 두 번 놀랐으며 아무도 용흥궁에 대해서 안내를 해주지 않아, 텔링스토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 사업을 진행하지 않음에 또한 놀라게 되었다.   용흥궁은 조선시대 왕을 배출한 곳이요 슬프고 아련한 텔링스토리가 있는 곳이기에 불운했던 철종의 인생처럼 후세에도 쓸쓸히 버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아려왔다.  

  앞으로 김포강화도 지역사회에서 용흥궁을 널리 알리는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어떤지 그 옛날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임금님의 첫사랑’이라는 드라마와 연계하여 스토리텔링 작업을 완성해 나갔으면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왕이 되었기에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불운한 인생을 살고 갔던 철종을 재조명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학생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역사교육의 장소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용흥궁을 떠나면서 몇 년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이 계속해서 오버랩 되었으며 배우 설경구가 외쳤듯이 철종도 필자에게 말하는 것 같다.  “ 나 다시 돌아 갈래 ” 


김형철/김포대학교 관광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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