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

이덕회 장군의 묘. 비석도 없이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다.
묘소 인근까지 조성된 택지. 왼편 나무 아래에 장군의 묘가 있다.
만인의 총.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만여명의 군사가 합장된 묘역이다.

지난 2000년 석모리 선영으로 이장
묘소 인근까지 택지개발로 훼손 심각
비석도 없고 잡초만 무성...대책 마련 시급

조선 선조 때 남원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덕회 장군. 장군의 묘소가 우리 김포에 있다. 2000년 석모리 1086-2번지 용인 이씨 선영으로 이장된 것이다.

남원성 전투에서 이덕회 장군과 함께 순국한 만여명의 군사들은 남원에 마련된 만인의총에 함께 모셔져 대대손손 그 충의를 선양받고 있다. 그러나 이덕회 장군은 순절 직후 만인의총에 모시지 않고 고향땅인 아산에 안장되었다.

세월이 흘러 지난 2000년 문선명 당시 통일그룹 측에 묘역을 포함한 땅이 팔리면서 이덕회 장군의 후손인 용인 이씨 부정공파 종친회 측은 이곳 석모리 선영에 장군의 묘를 이장했다.

그러나 지난해 장군의 묘가 있는 석모리 땅 대부분에 주택단지 조성을 위한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지금은 이덕회 장군의 묘를 포함해 대여섯 기 무덤만이 한 귀퉁이에 보잘것없이 남아 있다. 땅의 소유주가 종친회가 아니라 종손인 이모 씨 개인 명의로 되어 있어 벌어진 일이다. 이성환 씨 등 뜻있는 종중의 일부 후손들은 이덕회 장군의 묘를 제대로 관리하고 보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시청 문화예술과 담당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장군의 묘가 사적으로 지정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원형이 보존된 무덤이라면, 사당이나 비각 등이라도 남아 있으면 모를까 현재로는 이장으로 새로 조성된 지 불과 10여년밖에 안된 묘소라 달리 대책이 없다”고 밝혔다.

이덕회 장군의 묘는 비석도 없이 봉분이 허물어지고 잡초만 무성해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이 무덤인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상태가 심각하다. 우리 김포가 역사에 대한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도 묘소 보존에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나라사랑이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이덕회(李德恢, ? ~ 1597년) 장군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이다. 본관은 용인, 자는 경렬이다. 20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선전관으로 왕을 호종하고 왜병의 동향을 탐지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이후 종5품 홍양판관으로 임명돼 군비 강화 및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은 지난 임진왜란 때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함락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으로 보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남원으로 집결해 11만명의 군사로 남원성을 포위했다. 이덕회 장군은 불과 수개월 전 남원성으로 부임한 상황이었다.

이때 명나라 총병 양원이 남원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왜적이 남원부를 포위하자 남원성 안은 땔나무와 식량이 끊어지고 바깥의 원조가 미치지 못하여 곤경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이덕회 장군은 생사를 가리지 않고 성 밖을 출입하면서 식량을 응급 조달하여 성 안 사람들은 위기를 면했다.

이덕회 장군은 병졸과 침식을 함께 하며 군사를 모집하여 성을 지키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한다. 이 때 산성별장이며 부사이던 신호가 산성을 버리고 남원성에 들어왔다. 따라서 산성의 무기창고가 모두 적의 소유가 되었다. 이때 양원이 병사 이복남에게 누가 능히 성을 나가 산성의 무기창고를 불사르고 적의 침략을 무찌르겠는가 물었다.

그러자 이복남은 이덕회를 천거했다. 이덕회 장군은 이 일을 쾌히 승낙하고 밤중에 정예군을 이끌고 성을 나가 적의 포위을 뚫고 무기창고에 올라가 불을 놓고 성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적과 여러 번 전투를 벌여 죽인 왜적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모두들 장군의 공적을 치하했다.

오래지 않아 적의 세력이 커지면서 양원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고자 했다. 이덕회 장군은 크게 노하여 장중에 꿋꿋이 서서 “총병은 천자의 명을 받아 조선을 도우러 왔거늘 위급함을 보고 도망하고자 하니 이게 옳은 일인가”라고 꾸짖었으나 양원은 몰래 달아나 버렸다.

장군은 홀로 참나무 한 그루에 몸을 의지하여 적을 무수히 사살했다. 화살이 떨어지자 이덕회 장군은 칼을 빼어들고 좌충우돌하며 적을 무수히 격살하였다. 해가 질 때까지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더 싸울 수 없게 되자 이덕회 장군은 북쪽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4배하고 접반사 정기원, 병사 이복남, 부사 임현, 방어사 김경로, 산성별장 신호, 구례현감 이춘원과 함께 순국했다. 정유년 8월 16일이었다.

남원성에서 전사한 민관군의 수는 거의 만여명에 달했다. 난 후 순절한 시신을 한 곳에 합장하여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만들고 충렬사를 건립하여 이덕회 등 8충신을 받들었다. 그러나 이덕회는 만인의총에 합장되지 않고 아산 현충사 부근 선영에 안장되었다. 사후 이덕회는 병조참의에 추종되었고 남원 충렬사에도 배향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덕회를 병조참의에 증직하고 남원부에 충렬사를 건립하여 이덕회를 추모했다.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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