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토요일 늦은 저녁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필자가 지도하는 고등부에 출석하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드는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아이의 목소리는 다 풀려 있었고, 혀가 꼬부라진 외국인의 발음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술에 만취된 상태였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한참 동안을 횡설수설했는데 그 주정 속에는 반복되는 두 문장이 있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괴로워서 한 잔 했습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하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는데 이 아이가 던진 한 마디에 필자의 생각이 바뀌었다. “목사님, 괴로워서 한 잔 했는데 지금 너무 외롭습니다. 목사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어수선한 내용들로 일관된 통화였지만 인내를 갖고 끝까지 다 들어주었다. 전화를 끊고서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경험했다. 하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픔이 필자 마음 한 쪽에 스며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청소년 사역자로서 묘한 기쁨이 밀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가 경험한 아픔이란 ‘일생 중에 가장 순수하고 맑은 시기라 할 수 있는 어린 여고생이 정신을 잃도록까지 술을 퍼마셔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큰 억압과 눌림이 그 아이를 그렇게 몰고 갔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 한편에 그 외로웠던 순간에 교회 담당 목사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는 사실이 보람과 기쁨으로 다가왔다.
최근 어느 상담학 교수님에게서 이런 강의를 들었다. 갓난아기가 옹알이를 시작할 때 부모가 그 옹알이에 관심을 가져주며 박수와 격려를 보내주면 이 아기는 나중에 커서 어휘력이 발달하고 말을 조리있게 잘 하는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반면에 갓난아기의 옹알이에 부모가 반응을 보이지 않고 냉담으로 일관한다면 그 아기는 커서 자폐아가 될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가정이 아이들의 옹알이를 들어주는 공간인가? ‘그렇다’고 시원하게 대답할 부모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오직 목표는 일류대학이다”라는 구호 아래 모든 초점이 모아지다 보니 어느덧 학교는 함부로 입을 떼서는 안 되는 살벌한 독서실이 돼버렸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왕따가 되고 바보가 되는 환경이지 않은가.
그런 살벌한 곳에서 하루종일 긴장하고 사는 우리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면 어떤가. 긴장을 풀고 하루 내내 못 다했던 온갖 말들을 속시원히 털어놓는 공간인가.
혹시 자녀들이 집에 돌아와 학교에서 겪었던 답답한 일들을 하소연이라도 하려들면 “쓸데없는 소리말고 들어가서 공부나 해”라는 면박을 주는 부모는 아닌가.
요란한 구호 아래 자녀교육의 왕도를 찾기 전에 가장 기본적인 환경 개선부터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각 가정이 우리 자녀들의 사소한 옹알이도 귀찮아하지 않고, 내용의 경중을 판단하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편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장소가 돼야 한다.
이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불쌍하다. 어린 나이에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 충동을 느끼면서 사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아픔을 들어주는 어른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아파한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내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진정한 자녀교육은 시작된다. - -고촌제일교회 발행월간지 「행복이 가득한 가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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