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 불안정성, 체념, 쾌락… 이것들은 우리사회의 부정적 모습이며 우리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병리적(病理的)현상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확실한 미래예측이나 보장이 불가능하다보니 차분한 마음의 안정이 어렵고 그래서 희망을 접고 망각속에서 하루살이 즐거움이나 쫓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일의 기약없는 하루살이 생활풍조 말이다.
옛적에는 순리(順理)가 통했고 오늘의 고난을 참고 이겨내면 내일의 기쁨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내 하고자 하는 일도 일구어 낼수 있었다. 그래서 이를 참된 삶의 도정(途程)으로 여기고 살았다.
그러기에 뼈 부스러지게 일해도 기쁨과 희망이 있었고 골 깊은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푼푼이 늘어가는 저금통장을 들여다 보며 기뻐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랬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것은 바보스럽고 미련스런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줄서라고해서 맨 앞에 섰더니 갑자기 뒤돌아 서라는 바람에 꼴찌가 되더라. 그러니 어느놈이 줄을 서? 바른길 보다는 샛길을, 바른수 보다는 잔재주가 통하고, 사람을 믿었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고, 심지어 아이들교육도 믿고 맡길수 없고, 거짓말 안하면 손해보고, 몸바쳐 공들였으나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게 되었으니… 그뿐인가, 먹고 싶은것 먹지않고 입고 싶은것 입지않으며, 쎄빠지게 적금넣고 주택 입주계약금 냈더니 금융기관 문닫고 회사 망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생돈 날려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아둥바둥해서 집 살 필요 뭐 있나? 전세집이나 얻고 차(車)나 사고 즐기며 살지.
기왕 차를 살 바에야 ‘쪽 팔리지 않게’ 큰 걸로 사고…확실한 보장도 없는 내일을 어떻게 믿어? 고생하면 보람이 있어야지.
그러니 죽치고 앉아 “스트레스”나 팍팍 받고 있느니 까짓것 얼렁뚱땅 신나게 “앤조이(Enjoy)”나 하고 살지.
신경쓰다 잘못해서 병이나 걸려 죽느니보다는 백번낫지. 세상물결따라 노세노세나 부르지 뭐?물론 극단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병리현상은 이른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이땅 밑바닥에 자욱히 깔려있는 엄연한 지금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고 누가 이사람들을, 이사회를 이 지경으로 몰았단 말인가?모두 다스림속에서 연유된것 같은데도 누구하나 선뜻 제탓으로 자인(自認)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본래 악하고 삐뚤어져서 그리됐단 말인가?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무언가 누군가가 이사람들을, 이사회를 그렇게 만든것이다. 원인 제공이 있었기에 그리 된거지 어디 멀쩡한 사람들이 그리되고 싶었겠나?생각해보자! 한 가정에서 자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내일을 생각치 않고 당장 눈 앞의 유혹에 빠져 하루살이 즐거움이나 쫓는다면 그걸 자식만의 잘못으로 치부해도 괜찮을까? 먼저 무엇때문인지 그 이유를 살펴본후 그리고 그 부모의 탓도 살펴봐야 되지않을까? 물론 바깥의 못된 환경탓도 있겠지만, 부모가 자식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돈대서 공부시켰다고 부모구실 다하고 자식 잘 길렀다고 자랑할수 있을까?먼저 스스로의 처신을 돌아보고 자식이 빗나간 것이 자신의 불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잘못이 있으면 바로 고쳐 본(本)이 되도록하고 그리고 자식의 잘못을 바르게 고쳐주는 것이 참된 부모의 도리가 아닐까? 자식한테 진솔하게 할말을 하고 희망을 안겨주고, 내일의 소중함으로 일깨워주고, 그래서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큰 뜻을 이룰수 있다는 참된 삶의 이치를 몸소 깨우쳐 주는것 말이다.
이같은 이치는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다스리는 크기나 모양이 내용이 다르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마음이 상하고 생각이 흐트러진 사람들을 감싸주고 바르게 되돌려 놓는 일도, 그리고 또 그런 사람들한테 본(本)을 보여주어야 하는 일도 모두 다스리는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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