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백년간 한강 하구에 10여개 포구 발달

육로발달과 남북분단에 포구사라지고 역사 묻혀
한강 조운 500년 조선 쇠락과 경인선 개통으로 막 내려

강(江)은 땅 위를 흐르며 생명체에 필요한 물을 공급해주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다. 인류 문명의 역사가 시작된 곳도 강이다. 사람들은 강에서 고기를 잡아 부족한 식량을 대신하고 물을 마시고 피로를 풀며 즐거움과 행복을 느낀다. 큰 강 주변으로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줄기를 타고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교역과 상업도 발달했다. 서해와 만나 내륙으로 이어지는 한강의 시작점에 있는 김포가 과거 포구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명력 넘쳐 나던 한강의 영광이 냉전(冷戰)에 가려져 기억마저 희미하다. 조운(漕運) 중단으로 주인 잃은 강, 죽은 강으로 불리지만 한강하구의 부활을 기다리며 철조망 속에 가려진 옛 한강하구의 물길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한강 조운역사의 시작

3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김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하삼도(下三道)라고 불리던 충청, 전라, 경상도 즉 삼남지방에서 서해 바다를 타고 올라오던 화물 운송선들이 집결하던 곳이다.
개성이 도성이던 고려시대에는 이들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각종 물품을 실은 운송선들의 중간기착지였다. 서해를 거쳐 인천 앞 바다를 지나 강화와 김포 사이 손돌목의 거센 염화강 물살을 헤치고 힘겹게 빠져 나온 운송선들은 연미정(강화읍 월곶리)이나 유도(김포시 월곳면)에서 잠시 여장을 푼 뒤 조수를 이용해 강 건너 임진강을 통해 개성으로 물자를 수송했다.
한강이 본격적인 조운로(漕運路)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다.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성을 옮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강은 도성에 조성된 시전에 각종 필요 물품을 공급하는 주요 교통로로 발전하게 된다. 한강 나루터 주변으로는 도성으로 올라오는 미곡, 소금, 도성민들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인 조기와 새우젓 등의 물품 운송과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도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했다. 이들을 위한 배후시설에는 객주와 주막이 번창하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강 조운로의 시작은 이전 과거에서도 그랬듯이 서해 염화강과 한강이 만나는 머머리 섬이라도 불렸던 곳이 유도였다. 지금은 민간인 접근이 안 되는 북한과 마주한 김포시 최북단 월곶면 보구곳리 한강 한 가운데의 작은 섬이지만 한강 조운이 왕성하던 과거에는 빠른 물살의 손돌목과 염하강의 암초를 피해 한강으로 올라온 운송선들이 정박해 다음 물때를 기다리던 곳이다.

▲ 전류리포구


한강 하구의 포구들

여기서 출항한 운송선은 강령포나 조강포로 이동해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그 중 강 건너 북한 개풍군을 마주하고 있는 월곶면 조강리에 위치한 조강포는 임진강을 따라 개성으로 올라가거나 한양 마포나루로 향하는 세곡선이 머물던 곳으로 상업과 어업, 농업이 발달한 왕성한 경제활동이 이뤄지던 곳이다. 조강포 바로 아래인 월곶면 용강리에 위치한 강령포는 주로 화물선이 왕래하였던 포구로 조강포와 영정포, 마포, 문산포와 함께 한강 5포로 불렸던 곳이다.
이렇게 한강 본류를 타기 시작한 세곡선과 화물선은 하성면 마근포에 이른다. 지금은 민통선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지만 마근포는 과거 파출소와 기생집이 즐비할 정도로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는 많은 운반선과 어선들로 성황과 흥행을 이뤘던 포구다.
이들 포구에 머물며 때로는 한강 하구 특산물인 황복과 장어, 웅어, 숭어를 마포나루로 실어 나르던 이들 어선들은 누산포와 전류포구를 거쳐 한강 상류에 접어드는 지점인 감암포를 지나게 된다. 지금의 운양동과 걸포동 경계지점에 위치한 감암포는 강 건너 고양포를 오가며 나룻배로 사람들과 생필품들을 실어 나르던 곳으로 파주와 일산으로 오가던 분주한 포구다.
김포의 지명유례가 시작된 곳도 감암포라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감암포를 뒤로 하고 빠르게 강 상류로 밀려오는 조류를 타고 돛대와 삿대를 지어 한강 본류에 들어선 배는 행주산성 부근을 지나 염창목과 선유봉, 밤섬, 서강, 용산을 거처 마침내 마포 나루터에 이르게 된다.

▲ 감암포



뱃사람과 포구

한강 조운로(漕運路)가 시작되는 유도에서 마포나루까지 험난했던 128리의 물길을 뚫고 올라오는 동안 뱃사람들은 강 건너 달빛에 흥청거리는 불 밝힌 주막과 객주의 번화한 모습을 보며 더 나은 내일과 희망을 꿈꿨을 것이다.
뱃사람들의 이런 생각은 강화 외포리와 황청나루터에서 땔나무와 소금, 생선을 실고 마포나루까지 한강을 통해 물자를 실어 나르던 강화에서 전해내려 오던 돛단배인 시선뱃노래 소리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저 달 뜨자 배 띠우니 우리 출범 잘 되누나/ 바다 우에 저 갈매기 안개 속에 길을 잃고 까옥 까옥 울어 댄다/ 산비탈의 젊은 과부 뱃소리에 잠 못 이룬다/ 어서 빨리 노를 저어 조강 가서 물 서리세 /어떤 사람 팔자 좋아 부귀영화 잘 살건만 우리 팔자 어이허여 배를 타서 먹고 사나/ 저 달 지면 물참 된다 달 지기 전에 빨리 저어 향주참을 대여 보세/ 염창목을 올라 스니 선유봉이 비치누나/ 선유봉을 지나치니 장유들 술집에 불만 켠네/ 마포에다 배를 대고 고사 술을 올려주니 한잔 두잔 먹어 보세/ 허공중천 저기 저 달 우리 고향 비치겠지 / 어서 빨리 조기 풀고 고향으로 나려 가서/ 그리운 처자 만나보세 .

평양감사와 기생 애기의 사랑의 전설이 담겨 있는 애기봉 인근 강령포와 조강포 주막과 객주는 먼 뱃길에 지친 뱃사람들과 한양으로 향하는 길손들이 회포를 풀며 하룻밤 묶어가기 좋은 곳이다. 노래 가사처럼 목숨 건 거친 항해 끝에 나루터에 닿은 뱃사람들에게 젊은 과부와 기생은 안도와 희망이었을 것이다.
달이 뜰 때 물때가 맞으면 영락없이 밤에 배를 띄워야 하는 모습과 썰물 때가 되기 전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사공들의 급한 마음도 담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향교참과 행조참은 행주산성 부근을 가다가 잠시 쉬거나 밥을 먹는 곳이다. 지금의 염창동을 가리키는 염창목은 수초가 많고 물길이 얕아 안면도와 손돌목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험로 하나였고 선유봉과 장유는 지금의 선유도와 밤섬이다.

▲ 한강로 향산리


세계와 만나는 한강

조선의 개국과 함께 번성했던 한강 조운 500년의 역사는 조선의 쇠락과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막을 내렸다. 철도가 한강 조운을 대체하며 우리나라의 조운 역사가 끝나가던 무렵 유럽에서는 다뉴브 강 등이 국제 하천화를 통해 부흥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유럽의 강들은 무분별한 개발에 의해 환경재앙에 가까운 홍역을 치르기도 했지만 반성을 통해 생태와 개발, 수질과 수량문제, 문화교류와 관광 등 새로운 의제를 찾아냈다.
유럽의 강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세계를 받아들이는 동안 한강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한강 조운의 단절은 조국 분단의 역사와도 같이 한다. 흐르는 한강은 유역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마른 땅을 적셔 꽃을 피우고 곡식을 여물게 하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대한만국이 물길로 세계와 만나는 관문인 김포 한강 하구에 자유롭게 갈매기가 날아들고 한강이 서해로 흘러들 듯이 한강 하구에 무시로 배가 들고 나던 날, 한강의 역사와 함께 김포의 역사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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