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 행정, 농사정보 기사에서 도시문제로 비중 변화

시민의 생활상과 다양성 담은 기록들 김포변화 담아
2기 편집팀 지면변화통해 속보성, 발굴기사 높여
793개 지역신문 가운데  51개 지원사에 선정 영예

 김포지역 최초의 지역신문으로 첫발을 디딘 김포신문이 22일 지령 1000호를 맞이했다.

1990년 2월 29일 창간호를 시작으로 1000호가 발간되기까지 김포신문은 주민들의 알권리와 말할 권리를 위해 눈과 귀, 입이 되어 지난 21년간을 바쁘게 뛰었다.

김포신문이 취재하고 관심을 가진 기사의 변천은 곧 김포의 변천을 의미한다. 청년기를 맞은 김포신문이 1001호라는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창간 이후 주민과 함께 아쉬워하고 즐거워했던 김포신문이 바라 본 김포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도농복합도시의 태동
1990년 2월 27일~1994년 12월 12일(1호~200호)

 김포신문은 1980년대를 마감하며 언론자유화의 바람을 타고 1990년 2월 27일 제1호를 발행하며 시작됐다. 당시 창간호 1면은 상단에 김포군청 현(시청) 본관을 배경으로 '11만 김포군민의 거울 김포신문 창간'을 제목으로 하는 사진기사와 창간호 기념기사 주요내용, 통진읍 출신으로 시인인 임종철 약사(당시 서울카피라이트 클럽 총무)의 축시를 배치했다.

▶1990년 9월 수도권에 내린 집중 호우로 한강제방이 붕괴우려에 처해있자 민관군이 동원돼 밤샘 작업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김포신문은 새마을 단신과 김포발전에 기여한 기업체와 동문회 소개, 내 고장 발전의 기수, 영농교실, 농사메모를 고정란으로 당시 주민들의 생활상과 주민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분야에 보도의 무게를 뒀다.

특히, 김포문화 뿌리를 찾아서라는 고정란을 통해 김포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 넣었다.

중앙언론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1990년 9월 중부지방에 내린 집중호우에 대한 보도도 눈에 띄었다. 당시 김포신문은 사망자 6명과 6백여명에 이르는 이재민이 발생한 가운데도 한강제방 붕괴를 막기 위해 군관민이 합심해 위기를 극복했다고 보도했다.

또, 1991년부터 시작되는 쓰레기 분리수거와 가짜 김포쌀 문제를 최초 보도한데 이어 3월에는 통진면 가현리 수로에서 무게 4백g, 길이 37cm의 슈퍼 개구리가 포획됐는데 "먹이를 주어도 먹지도 않아 고민 중"이라는 기사는

재미를 더한다. 월곶면 갈산리 출신으로 페더급 동양 챔피언인 박찬목 선수의 세계타이틀전 보도도 추억속의 한장면으로 아련하다.

1992년 10월 12일 100호를 발행한 김포신문은 국방부의 하성면 후평리 일대에 대한 북한 지하땅굴 재 조사와 농업지역의 허와 실, 검단쓰레기 매립장 문제 등을 보도하며 생활 속 기사에서 지역 현안으로 취재 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김포문화상'에 대한 문제와 김포CC 허가과정을 조명하며, 지역사회에 미칠 영향을 분석 보도했다.

부천상공회의소 지소로 출발한 뒤 정식 간판을 내건 '김포상공인회의소' 보도는 기업인들에 거는 주민

▶김포상공회의소는 부천상공회의소 김포지소로 출발해 1982년 당시 연영석 군수를 비롯한 상의 관계자들이 김포지소 현판식을 갖고 있다.
들의 기대를 담았다.

농협이 금리를 인하하면서 영농자금은 제외했다는 116호 보도와, 농협과 축협 등 관내 7개 금융기관이 크게 성장하면서 정작 서민들을 위한 대출은 외면하고 있다는 보도는 농민들과 서민들을 분노케 했다.

김포종고의 공고전환에 대비해 인문고 설치가 시급하다는 보도는 김포고등학교 탄생의 촉매제가 됐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8전9기의 신화를 만들며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두섭 의원에 대한 얘기도 기억에 남는 보도다.

1994년 당시 최대 숙원인 국도 서울시계(視界)에서 양촌면 누산리 구간의 국도 확포장 공사를 IBRD차관사업으로 6월 완공했다는 기사, 현 김포시민회관인 군민회관과 실내 체육관 개관 소식을 전하면서 다가올 1995년에 대한 희망을 품게 했다.

반면, 김영삼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계획에 따른 검단면의 인천편입 소식은 주민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당시 김포신문은 여론 조사 등을 통해 검단 인천편입에 반대하는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올곧게 전달했다.

 ◆행정구역 개편과 366년간의 군(郡) 시절 마감
1994년 2월 26일~1999년 3월 22일(201호~400호)

 1995년부터 지령 300호가 발행된 1997년 2월 기간 동안 김포는 북변택지와 사우택지 개발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1995년 검단면의 인천시 편입을 앞두고 김포신문이 지역주민들의 분위기를 스케치했다.

개발 및 부동산과 관련한 기사가 과거보다 비중 있게 다뤄졌다.

첫 민선자치단체장 선거에 따라 군정에 대한 군민들의 관심도 높아지면서 군정에 대한 보도가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다.

특히, 유정복 군수의 초대 민선 군수 당선과 1997년 1월 17일 한강을 사이에 두고 김포군과 북측 개풍군이 마주 보고 있는 유도섬에서 발목이 다친 채 겨울을 보내야 했던 '황소' 구출작전 보도도 큰 관심을 끌었다.

검단의 인천편입에 따른 '검단 쓰레기 매립장'에 대한 김포 매립지 표현으로 김포 위상에 문제가 있다며 '김포'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면서 '김포'가 아닌 '수도권 매립지'로 명칭이 바뀌게 하는 역할도 김포신문은 담당했다.

농촌지역에 머물러 있던 사우리와 북변리 지역이 도시지역으로 변화되는 과정도 다뤘다.

고촌정수장 준공과 승가대학 기공식에 대한 소식과 전국 최초의 '농업인의 날' 제정도 빠르게 소개했다.

지면 구분이 없이 302호까지 발간되던 김포신문은 1997년 3월 3일 303호부터 2개 면을 '영농면'과 '독자면'으로 할애했다.

시 승격을 앞두고 산업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들에게 기존의 단순한 농사정보 차원을 넘어 다양한 농업정책을 제공함으로써 경쟁력을 한층 끓어 올리자는 취지에서다.

반면 '독자면'은 북변택지개발로 인한 외부 유입주민과 기존 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군정에 반영하는 '소통의 창' 역할을 담당했다.

도시화로 인한 거주형태 변화에 따른 사회문제에 대한 보도도 많았다.

김포신문은 1997년 4월 21일자 보도를 통해 현 김포여중 뒤편 신안아파트 시공과 관련해 주민들이 산사태를 우려해 15층에서 7층 이하로 사업승인을 변경해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시의회 냈다고 보도했다.

366년간의 군(郡)시절을 마감하고 시(市)로 승격하는 역사적인 순간도 함께 했다.

▶지금은 확포장 공사로 도로가 넓어지고 직선화됐지만 1990년대 만해도 걸포동 앞 도로가 급커브 선행으로 교통사고가 빈발했다.

시공사 부도 등으로 지연되던 국도 48호선 천등고개 구간 확장과 북변터널 개통소식을 전하며 수도권 중심도시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점쳐보기도 했다.

1999년 3월에는 시 승격에 따른 시민들의 문화갈증 해소를 위해 대원악기 후원으로 김포시민회관에서 공연 행사를 연 천재 피아니스트 유진박과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에 앞서 두사람을 만나 김포의 문화예술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소개하기도 했다.

 ◆신도시에 대한 갈등 표출..개발문제 전면에
1999년 3월 29일~2003년 6월 30일(401호~600호)

 1999년 3월 29일부터 401호를 발행한 김포신문은 500호가 발행된 2001년 5월 7일까지 사회, 정치, 경제 부문에 대한 지면 구성을 늘렸다.

정치면에서는 1999년 5월과 6월 홍종운의원(양촌면)과 민병혁(하성면)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9월 16일 재선거에서 김병우(양촌면), 이준래(하성면)의원의 당선 소식을 빠르게 전했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하수처리를 위해 1천억원 규모의 하수종말처리장 착공 도중 과거 사업부지에 매립된 12만㎡의 쓰레기가 뒤늦게 발견 돼 착공이 지연됐다는 소식도 담았다.

▶故 김수한 추기경이 1991년 12월 13일 애기봉을 찾아 성탄수 점등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미사를 집전한 내용을 취재했다.

1995년 인천으로 편입된 검단환원을 위한 움직임이 경기도 차원에서 시작되자 김포검단환원추진위가 결성되고 시의회에서 추진위 활동을 위한 조례 제정 청원서 접수를 통해 활동의 지원근거가 마련되는 순간도 김포신문은 지켜봤다.

1999년 7월 5일간 집중호우로 6천6백ha의 농경지가 침수되고 1명이 사망하는 등 17억원에 이르는 피해가 발생한 소식과 공무원 연금법 시행으로 행정공무원과 교육공무원의 명퇴가 줄을 잇는다는 보도는 당시 공무원 사회의 구조조정에 대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1999년 12월에는 시의회에서 열린 경전철 사업 시정 질의를 지상중개하면서 도시철도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끓어 올렸다.

거동이 불편해 골목길에 앉아 쉬고 있던 70대 할머니를 후진하던 차가 발견치 못하고 치어 사망했다는 사건보도도 함께 실렸다.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 모았던 유도 황소와 제주도 암소사이에서 태어난 유도 황소 2세인 '평화통일의 소'가 제주도로 입양을 간다는 소식도 전하면서 평화통일을 기원했다.

시가 발주하는 물품과 용역 90%가 관외업체가 독식한다는 보도를 통해 말로만 외치는 지역경제 활성화에 대한 시정방침을 꼬집었다. 치매노인들의 안전한 귀가를 돕기 위해 김포시가 주소가 새겨진 은팔찌를 제공했다는 기사는 노인복지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

2001년 5월부터 2003년 6월 30일까지 지령 600호가 발간되기 까지 김포시는 격동의 시기였다.

▶제과업계의 선두주자였던 (주)고려당의 통진 분점을 소개하는 기사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2001년 신년호 독자란을 통해 예비 장기동 주민은 국도에 설치된 나진검문소의 이전이나 폐지를 주장했다. 이 문제는 지금도 김포시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 중 하나다.

도시화로 인해 도로 여건이 좋아지면서 새로 들어서는 식당들을 소개하는 코너도 만들어졌다. 6대째 살고 있는 한옥집을 개조해 아끼바리 김포쌀로 정성이 가득 담긴 한정식을 판다는 광고기사가 색다르다.

연말을 맞아 당시 설 제수용품이 4인 가족 기준 10만1천770원이라는 기사는 10년이 지난 지금의 설 제수용품가격과 비교해 보면 물가 오름세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수돗물 불소화 사업에 대한 찬반 논란은 지금도 유효하다.

현재 함상공원으로 불리고 있는 대명포구의 기틀이 세워진 대명포구에 대한 국·도비 지원내용 보도는 대곶면 지역주민과 어민들에게 희소식이었다.

2003년 5월 9일 정부가 김포신도시를 발표하면서 김포신문은 김포신도시가 자족가능을 할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달았다. 이에 김포신문은 김동식 시장과 도시연구원장이었던 당시 본보 논설위원이었던 노춘희 박사 등 전문가 취재 등을 통해 김포신도시의 방향을 집중 보도했다.

또, 신도시 발표로 인한 사업지구 내 각종 사업 중단에 따른 시민불편과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심

▶1990년 9월 수도권에 내린 집중 호우로 한강제방이 붕괴우려에 처해있자 민관군이 동원돼 밤샘 작업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층 보도했다.

"신도시 등 각종 개발 반대 김포 중부권 '전쟁터'"란 제목의 기사는 정부의 밀어붙이기 식 사업에 대해 주민들의 실익과 명분으로 맞서면서 주민들의 소리를 전달했다.

 ◆각종 개발계획과 주민욕구 폭발
2003년 7월 7일~2007년 10월 11일(601호~800호)

신도시 건설 계획 발표 이후 지역사회 곳곳에서 분출된 문제에 대해 김포신문은 대안을 제시하며 격랑의 세월을 함께 했다.

신도시 사업부지 내 2천여기의 분묘 처리문제는 납골시설 확장이라는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

또, 신도시개발에 따른 전력수급을 위한 한전의 감정동 변전소 건립계획에 대한 릴레이 보도를 통해 주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했다.

신도시 건설에 반대하는 1천3백여명 주민들의 과천 정부종합청사 시위와 국회 시의회를 취재하며 신도시 건설로 인한 지역사회에 파생될 문제점을 예고했다.

대곶면 대벽리의 토석채취장 비리의혹과 관광성 외유로 비친 73명의 시 공직자의 대규모 해외연수 등을 보도하며 시 행정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지역주민을 갈라놓으며 최근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신도시 건설로 인한 경전철 건설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김포신문은 시정 질의를 통해 경전철 건설을 놓고 벌이는 시의회와 김동식 시장의 힘겨루기를 보도하며 시민의 시각과 선택의 폭을 넓혀 나갔다.

신도시 건설에 따른 군사시설보호구역의 조정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김포신문은 김포의 균형발전을 위한 군사시설보호구역의 재조정 필요성 보도를 통해 군사시설보호구역 내 주민들의 재산권 제한과 피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신도시 소용돌이에 몸살을 앓았던 김포시는 다시 신도시 확장계획과 전류리 습지 보호구역 지정, 경전철 문제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정확하고 신속한 보도를 위해 취재 현장에 있어야 했던 김포신문도 빠르게 전개되고 쏟아져 나오는 중앙개발 계획과 이에 맞춰 진행되는 후속 취재에 쉴 틈이 없었다.

김포신문은 군사시설보호구역과 문화재 보호구역의 중첩규제를 받고 있는 하성면 한강 하류지역에 대한 정부의 습지지구 지정계획을 보도하면서 시민과 의회, 시의 반발 움직임을 보도했다.

또, 확대와 축소, 다시 확대된 신도시의 개발계획 등을 심층보도하며 미래 김포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김포외고 설립 가능성의 최초 보도와 도교육청 감사를 통한 김포교육청의 비위행위 적발 보도, 시 행정사무감사 현장 취재를 통해 시정 감시의 끈을 놓지 않고 왔다.

다양한 시민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시민광장과 청소년 상담 코너 등의 고정란을 통해 시정에서 놓친 시민 불편사항과 청소년들의 생각과 고민을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유정복 국회의원과 민선 4기 지방선거를 통해 시장에 당선된 강경구 시장이 김용덕 건교부 차관을 만나 신도시 개발에 따른 교통량 증가와 집중 호우로 인한 한강제방도로 보강을 요구, 2차선의 한강제방도로 외에 6차선의 한강로 건설을 위한 약속을 받아냈다는 보도는 여름철만 되면 불안에 떨어야 했던 김포시민들의 걱정을 덜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민 눈높이에 맞춘 변화와 혁신의 시기 
2007년 10월 18일~2011년 12월 23일(801호~1000호)

장기지구 입주와 한강신도시의 실시계획승인, 양촌학운산업단지 개발, 시네폴리스 사업계획이 발표된 2007년부터 최근 3년간 김포지역은 다양한 개발계획이 앞 다퉈 나오던 때이다.

군사시설보호구역과 수도권정비계획법 등 이중 삼중의 중첩규제로 억눌려 있던 시민들의 욕구도 분출됐다.

한강시네폴리스 개발계획 발표와 정부에 요구한 신곡수중보 이전 요구는 한강하구에 위치한 김포의 제2전성기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기대를 모았다.

도시화에 따라 시에 제기되는 민원의 종류도 교통과 도로, 학교 등 기반시설과 관련한 문제로 바꿨다.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는 유입 인구가 늘면서 시 행정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치가 높아졌고, 행정과 충돌도 많아졌다.

첫 신입생을 선발한 김포외고의 시험지 유출사건은 교육도시 김포를 꿈꿨던 시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고막리 지역 주민 97명이 시의 어정쩡한 인허가 행정으로 사업주로부터 97억원의 배상소송에서 가압류를 받은 고막리 한우단지 사태 또한 김포신문이 보도한 잊히지 않는 사건이다.

버섯 재배사를 짓겠다고 허가받은 뒤, 창고나 공장으로 사용하다 검찰 수사에 적발 된 "뒤늦게 반성문 쓴 '농지전용' 행정"기사와 국도 48호선 나진검문소 주변 농지의 농가주택 점령실태를 보도한 농지 난도질 기사는 불법 농지전용 문제에 경종을 울렸다.

2009년 1월 발생한 수돗물 단수 사태 또한 비중 있게 다뤄졌다. 이후 시는 광역상수도 확보에 나서 오는 2013년부터 팔당상수원을 원수로 사용하게 됐다.

신종플루 유행으로 인한 문화행사 등의 각종 행사의 취소는 2009년 겨울을 더욱 춥게 만들었다.

김포신문은 도시화로 인한 다양해진 시민욕구 충족과 정확한 정보전달을 위해 창간 이후 19년째 고집하던 1면을 비롯한 지면을 전면 개편하고 발굴기사를 늘려 볼거리를 늘렸다.

또,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신속성을 위해 실시간 속보체제로 전환했다. 현장 기사 위주의 사회 고발성 기사에 대한 비중을 높여 시정을 견제했다.

민선4기에서 5기로 넘어 오면서 정치 이슈가 된 도시철도문제에 대해서는 올바른 시민 판단을 위해 주의 주장에 대한 옳고 그름을 신문에 담아왔다.

특수학교 설립문제를 최초 보도하면서 장애학생들의 교육문제에 대해 시민사회가 고민하게 했고, 한강신도시 건설에 따른 국도확장 등 기반시설 공사 지연문제 등의 현장 보도를 통해 주민들의 겪는 불편을 외부에 알렸다.

지역신문 발전기금 가운데 기획취재 사업비를 지원받아, 환경문제와 개발 간의 갈등 문제를 기획시리즈로 다뤘고, 아직도 끊나지 않은 구제역 보상문제 등을 심층 기획으로 6회에 걸쳐 분석기사로 다루며 지역신문의 심층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이끌어 냈다. 특히 도시화에 따른 농업위기 극복을 위한 좌담회를 비롯해 문화예술 분야의 발전, 민선4기의 평가 등 다양한 좌담회를 개최하고 보도함으로써 새로운 김포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령 1천호 발간을 맞아 되짚어 본 지난 21년 김포역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시민들의 욕구와 갈망이 분출하는 시기였다.

김포신문은 충돌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김포의 역사 현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시민과 호흡하며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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