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9대 숙종 후궁 숙빈 최씨의 '묘'

무수리에서 왕의 여자,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 숙빈 최씨

파주시 광탄면의 보광사에서 영장리 267번지 방향으로 이동하다 보면 꼿꼿한 모양으로 높게 솟은 나무들이 우거진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다 보면 왼편에 지세 좋은 원소(園所)가 보인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사극 동이의 실제 주인공인 숙빈 최씨가 잠들어 있는 소령원(昭寧園)이다.

입구에서 올려다 본 소령원 전경

 

소령원이라는 안내 간판을 따라 출입문을 지나 원내로 들어서면 안쪽 저편으로 용 등줄기 모양의 등성이가 눈에 들어온다. 좌우로 빽빽이 둘러싸고 있는 높다란 아름드리 고목은 상서롭지 않은 원소의 지세에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등성이를 타고 무덤으로 올라가면 마치 용의 척추를 따라 걷는 느낌이다. 쨍한 햇볕 아래 걸으면 땀이 흐를 정도의 경사를 따라 한발 한발 나아가면 잔뜩 등을 구부리고 있어 보이지 않던 숙빈 최씨의 무덤이 보인다.

무덤 앞 묘비의 옥개석은 대궐의 지붕모양이다.


동향의 봉분 뒤편에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봉분의 양쪽으로 석호(石虎)· 석양(石羊)이 각각 2필씩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정면에는 비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일렬로 놓여 있고 그 좌우로 망주석, 문인석 석마(石馬)가 대칭으로 배열돼 있다.

무덤 앞을 지키고 있는 묘비의 옥개석은 대궐의 지붕모양을 본 떠 만들었다고 한다.

곡장 뒤로 돌아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배경은 까막눈에도 “과연 명당”이라는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한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소령원 터


소령원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사냥에 나섰던 연잉군(훗날 영조)은 이 곳에서 초상을 치르려는 한 백성이 땅을 파놓고 하관하지 않고 울고만 있는 것을 목격했다. 연잉군은 그 모습을 보고 이유를 물었고 그 백성은“땅을 판 자리에서 샘이 솟아 하관을 할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연잉군은 한 지관이 자리를 잡아 준 것을 밝혀내고 우선 이 백성을 위해 양주현감(당시 파주는 양주현)에게 파발을 띄워 재물을 빌어 상주에게 후하게 장례비용을 장만해 주도록 했다.

그리고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그 지관을 찾아 물이 나는 자리에 묘자리를 쓰도록 한 이유를 물었고 그는 “그 자리를 잡아줘서 그에세 큰 재물이 생겼고, 또한 이 묘자리는 이미 주인이 정해져 이 근방에 묘를 썼으면 어차피 후일 이장해야 한다(조선시대에는 능으로 택지되면 사방 10리 안에 있는 주변 무덤은 강제 이장된다)”고 말했다.

연잉군이 “그럼 이곳의 주인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그대의 어머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숙빈 최씨가 졸하자 그 자리에 를 안장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진실 여부를 떠나 소령원이 어느 곳에 빠지지 않는 명당임을 시사한다.

소령원으로 향하는 길 초입에는 숙빈 최씨의 신도비가 모셔져 있다.

숙빈 최씨는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창덕궁에서 영조를 낳고, 1718년(숙종 44) 3월 19일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해 5월 12일 당시 양주 땅이었던 소령원 터에 안장됐다.

7살에 궁내 최하 계급인 무수리로 입궁했으나 숙원(淑媛)·숙의(淑儀)·귀인을 거쳐 숙빈에 봉해지고 죽어서는 임금의 어머니로 불린 그녀는 상상도 못할 신분 수직상승을 했다. 게다가 효성 지극한 아들은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 묘를 능(陵)으로는 올려 주지 못했어도 원(園)으로는 바꿔주었다.

하지만 어떤 능의 주인도 조선 최고의 명당을 차지한 숙빈 최씨에게 귀천을 따지려 선뜻 나서지는 못할 것이다.

소령원은 문화재 보존관리를 위해 일반에 공개되고 있지 않아 조선 능(陵) 가운데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전에 허가를 받으면 출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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