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浦의 토박이...朔寧崔氏편<6>

최항(崔恒) 선생의 효행(孝行) 과 선비정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선생에 관한 행장(行狀) 일부를 소개해 보겠다.
1459년 51세 때의 일이다. 전년(1458)에 선생께서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시묘(侍墓) 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임금께서 기복출사(起復出仕: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감)를 명하자 그 왕명이 자식 된 도리에 어긋남은 물론 조정의
기강에도 벗어나 옳지 못하므로 응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글을
3회(1459년 5월 11일,12일,13일)에 걸쳐 상서(上書)하였으나 3차례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당시 선생이 3회에 걸쳐 상서(上書)한 글은 “기복불응상서문(起復不應上書文)”
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후대에도 효행의 근본이 되는 글로서 읽히고 있다
1453년 45세 때는 정난공신 1등에 책훈(策勳)되었으나 선생께서는 정난에
있어서 공효(功效)가 없었다고 공신(功臣)의 호(號)를 삭제하여 줄 것을 주청하였다.
1466년 58세 때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시자 군사관계는 적임이 아니라고
간절히 사양하였다.
이와 같은 최항선생의 행장(行裝)내용은 조선왕조 선비의 기개(氣槪)와 효행(孝行)의 표상으로서 선생의 효행정신 과 선비정신을 잘 나타낸 것이다.

최항(崔恒)선생 과 김포
김포시 양촌면 학운리 삭시마을이 최항선생이 사셨던 옛터이다.
현재는 태허정 정자(亭子)와 사시던 집은 보이지 않고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실제로 정자 터와 집터 에서는 550년 전의 기와장이 발견된다.
현재는 선생께서 사셨던 옛 집터에 선생의 유허비(遺墟碑)와 석상(石像)이 세워져 있다.
또한 선생께서 친히 심으셨다는 느티나무는 아직도 동네어귀에 남아서 선생의
채취를 느끼게 하고 있다.
조선조 순조(純祖)때 에는 종중 판서(判書) 어른께서 이곳 김포 삭시는 태허정 최항
선생이 사시던 옛터이니 장례(葬禮)를 함부로 행하지 말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그곳에 있는 최항선생의 유허비에는 선생과 김포삭시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해동군자국(海東君子國)에 하늘이 명현을 내려 보내신 것은 반드시 큰 뜻이 있음이다.
옛고을 경기도 통진부 대파면 학운산 아래 삭시리 현(現)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학운리
삭시는 삭녕최씨(朔寧崔氏)가 터를 개척한 지명이다. 최항(崔恒) 선생은 이곳에 태허정(太虛亭)이란 정자를 짓고 스스로 호를 태허정 이라 하셨다.처남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 선생과 이웃 대포리(大浦里)에 목안정(木雁亭)을 짓고 사시는 눌재(訥齋) 양성지 선생이 이곳에서 교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학(鶴)같은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학운리(鶴雲里)라 글 읽는
소리 드높아 고음(高音) 달(地)이라 전해지면서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이 찾아든 경치 좋은 해안의 명소였다. 이곳 삭시마을에 우거(寓居)하시면서 태허정에 편액(扁額)하고 눌재 선생과 사거정 선생 같은 명류들과 교관하면서 시서를 강론하고 국사를 논의하며 중형(仲兄)
이조참판 반송당(伴松堂) 형(衡)공과 친질(親姪) 참의(參議) 영주(永澍)공과 서로 이웃하고 서로 망견(望見)하며 화기애애(和氣靄靄)하던 선비 마을이라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만경창파(萬頃蒼波)에 손을 씻고 갈매기 가무(歌舞)에 즉흥시를 읊던 이곳에서 쓰신 계이자시(戒二子詩)는 천추후손(千秋後孫)에게 하는 당부 말씀으로 남아 있다.
심은 나무는 거목이 되어 푸르고 깊은 우물의 맑은 꿈은 항상무진(恒常無盡)하며 이름난
선비들이 운집(雲集)함은 도덕과 학문의 명성(名聲)이 되었고 집안의 화목과 형제간에
우애함은 두루 모범이 되었으니 그 자취마져 없을 수 없어 선화한 옛 터전 경치 좋은
이 유허지(遺墟地)엔 기와 조각이 보였다.

최형(崔衡) 선생 과 김포
김포시 대곳면에 가면 평장산(平章山)이 있다.
경기도 연천군에 현재는 비무장지대안 이라 갈수가 없지만 삭녕최씨(朔寧崔氏)의 본관이 된
삭녕(朔寧)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삭녕최씨(朔寧崔氏)가 시작된 곳으로 시조부터 5대조의 묘소가 모두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 이곳 마을 이름이 바로 평장동(平章洞)이다. 평장동은 삭녕최씨(朔寧崔氏)의 시조(始祖) 중시조(中始祖) 모두 고려조에서 평장사(平章事) 라는 관직을 하게 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평장산(平章山) 역시 이곳에 삭녕최씨(朔寧崔氏)가 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장산(平章山) 기슭에는 최씨 일가들의 묘소가 많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묘소는 최영주(崔永澍)선생의 묘소이다.
최영주(崔永澍) 선생은 반송당(伴松堂) 최형(崔衡)선생의 아드님이시다.
최형(崔衡) 선생은 삭녕최씨 5세조로서 이조참판의 관직을 역임하여 참판공파를
이루게 되는 파조(派祖)가 되시는 분이다.
최형(崔衡) 선생은 조선 초기 문종(文宗) 단종(端宗) 세조(世祖)로 왕권이
넘어가던 시기에 조정에서 활동 하시다가 병자사화(丙子士禍:단종 복위 사건)를
격으신 후 이조 참판직을 버리시고 조정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후 스스로 자신의 귀가 먹었다고 하면서 은둔생활을 하시게 된다.
이때 최형 선생이 은둔생활을 하신 곳이 바로 김포시 대곳면 평장산 아래 능골 이다.
옆 동네에 사시는 최형 선생의 동생이 자주 방문하면서 시서와 조정 일을 의논하곤
하였는데 바로 이 동생분이 최항(崔恒)선생인 것이다.
실제 최항선생의 정자인 태허정의 정자 터가 형님 댁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이후 평장산 아래는 반송당(伴松堂) 최형(崔衡)선생의 아드님이신 최영주(崔永澍)공 이후 후손이 정착하며 참판공파(參判公派)를 이루었고 옆 마을 삭시(朔是)에는 최항(崔恒)선생의 손자인 최수걸(崔秀傑)공 이후 후손이 정착하며 사정공파(司正公派)를 형성하게 되었다.


삭녕최씨(朔寧崔氏) 김포 후손 과 활약상
김포시 양촌면 학운리 입향조는 태허정(太虛亭) 최항 선생의 손자로 오위 부사정을 지낸 수걸(秀傑)과 그 아들인 8세손 준형(濬亨)으로 참봉(參奉)을 지냈고 그의 손자인 10세손 오봉(五鳳)은 오위부사과(五衛副司果)를 지냈다. 학운리 출신으로서 마지막 참봉(參奉)을 지낸 20세손 흥구(興九)등 자손이 번창하여 학운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조선말 흥구(興九)에게 내린 참봉 교지(사진)는 지금 손자인 능행이 보관하고 있다.
삭녕최씨 사정공파 후손들은 2005년 태허정(太虛亭) 최항선생의 옛터인 김포 삭시에 최항선생의 석상(石像)과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도로에는 유적지 표지판을 설치하였으며 김포시 문화원에서는 최항선생의 유품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삭녕최씨 김포 문중에서 나온 인물중에 김포시나 대한민국 국가 사회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현직 인사로는 흥구(興九) 손자로 삭녕최씨 낭장공파 회장인 능행(能行), 대한 한약사회 부의장이고 사정공파 총무인 성록(成綠) , 김포시의회 전문의원인 돈행(敦行), 건원엔지니어링 상무이사 성수(成壽), 강화중학교 교장인 성룡(成龍), 나무한의원 한의사 혜림(慧林), 시흥시 국악협회장 성란(成蘭) , 김포한강신용협동조합 감사 성호(成浩)등이 있다.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