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俊 安
언젠가 가냘픈 아우성 소리가 귓전을 맴돌더니 이제는 아예 귓창을 찢을 듯 요란한 아우성이다.
폐에 기별도 안갈 산림을 이곳 저곳 거침없이 훼손하는것에 대해 아득히 이어온, 뭇 생명들의 걱정이 우려의 아우성 소리로 변하더니 이제는 울분을 토하는 아우성 소리로 여울져 예제서 요동친다.
옛 우리 선조들은 때묻지 않은 청정한 山을 무척 숭배하여 신성시 해왔다.
일상의 삶에 있어 극심하게 가물거나, 가정에 액운이 닥쳐 삶이 고달프거나, 나라에 재난이 들면 산정에 신당을 지어 기우제, 사령제, 당산제, 호국제 등, 天신과 山신을 우러러 간절히 빌며, 구원을 청해 삶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이조 중종 당시 동향각지에 서원수가 일백여개에 이르렀고 , 그 곳에서 학문과 도를 넓히고 닦은 선비를 士林 이라고 하여 매우 존경하였다.
산야에 묻혀 학문과 도를 연마한 士林 , 곧 지방선비의 의식은, 불의와 세속적 탐욕에 물들지 않는 조화롭고 오묘한 산림의 고고한 정신이 그 기반이었다.
또한, 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학문과 도를 갖춘 선비를 山林 이라 하여 士林보다 한품격 더 높은 인품으로 추앙해 존경하였다.
山은 삶의 고향이요, 학문과 도를 연마하는 수련장이요, 끝내 혼백이되어 내세를 입문하고 기거하는 안식처였던 것이다.
그렇듯 소중한 우리의 산림을 일제가 강점한 후, 우리나라의 지세를 제압, 영원히 속국화 하기 위해 명산마다 혈맥을 찾아 곳곳에 정기를 끊는 쇠꼬챙이를 박았으며, 아직도 그 쇠꼬챙이들을 다 제거하지 못한 것이 상당수에 이른다고 한다. 마치 인간의 혈맥 곳곳에 침을 꽂아 전신을 마비시키는 것과 같은 악랄한 수법을 썼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주변산하를 휘둘러 보자
『산업화 공업화』라는 개발 논리로 팔을 걷어 붙인 사람들의 손아귀에 의해 푸른 산림은 무참히 훼손되어 간데없고, 잿빛세상으로 추락한 곳곳에 흙과 물과 공기의 시체가 부패되어 그 악취가 하늘을 찌른다. 생명들의 삶의 불가결한 요소들이 그렇게 파괴되어 썩어가고 있으니, 뭇 생명들의 저항하는 아우성 소리가 산처럼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왜국은 우리 조국의 국기를 꺾기 위해 정기가 서린 산맥 산정 곳곳을 미친 듯 찾아 쇠꼬챙이를 꽂았지만,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스스로 산혈을 끊고 황토살을 갈가리 찢다 못해 통째로 들어내는가.
그리하여 山마다 江마다 자연환경의 시체들 썩는 악취가 코를 쥐도록 진동하게 만드는가.
그 목적이 오직 붉은 지폐 한 움큼 거머쥐기 위함이란 말인가.
산업화 공업화의 잿빛세상에서 얻어지는 그 붉은 지폐가 우리 인간에게 과연 그 가치이상 소중한 것일까?
나를 망치고, 내 가족을 망치고, 내 후손, 내 조국을 망치는 자연환경의 죽음보다 그 붉은 지폐가 그토록 더 소중하단 말인가.
흙과 물과 공기의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공포로, 그리고 참담한 고통으로 우리에게 다가섬을 우리는 왜 깨닫지 못하는가.
아니면 왜 애써 외면하는가!
어쩌면! 어쩌면!
나 나(我)는 망해도, 나라(國家)는 망해도, 자연공간만은 반드시 원형대로 살아 영원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불가사의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해 내신 창조자의 뜻의 본질이기에 우리 인간들은 그 뜻을 결코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평화로운 안식, 정겨운 기쁨이 가득 담긴 푸른동산!
산정을 향한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어릴적 옛 추억들이 맑고 싱그런 얼굴을 내미는 그윽하고 아늑한 그런 작은 계곡이 나오고, 푸른 숲속 푸른물이 청아한 소리를 내면서 계곡을 흐르는 풍광을 보노라면, 왠지 옛 그리움이 울컥 솟구치며 눈시울에 물기가 돈다. 먼 옛날의 향수 때문일까?
산정을 오르면 수 백년 묵은 노송 한 그루가 묵묵히 시가를 조망하며 서 있고, 그 노송에 기대어 발아래 아득한 세상을 굽어 보노라면, 옛 젊음이 그대로 가슴속에서 용솟음 친다. 지금은 오를 수 없는 저 장능산의 옛 모습을 상기하며 그렇게 상상해 볼 뿐인데 나를 애상에 젖게 한다.
제 57회 식목일이다. 산을 다시 생각하고 산 사랑의 마음을 스스로 되짚어 보며 또 다짐도 해 보자.
그리고, 아우성 소리의 실체도 한번쯤 챙겨보자. <김포시 산림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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